문화 예술

촛불신부, 원하지 않는 안식년

녹색세상 2008. 8. 22. 02:08
 

“원치 않는 안식년을 떠나게 됐네요. 인사결정 권한은 교구장님께 있으니…. 사제단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라는 뜻으로 안식년을 주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지요.”


지난 6월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에 참석했던 수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다치고 쓰러질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촛불미사’로 군중을 압도했다. 촛불미사에 참석했던 일부 참가자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사제단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시민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던 경찰도 신부들의 십자고상과 묵주 앞에서는 물러섰다. 국민은 사제단의 뒤를 따라 촛불행진을 벌였고, 이 분위기는 각 종교계로 확산돼 개신교ㆍ불교가 바통을 이어받아 평화 촛불집회의 맥을 이었다.

 

▲ 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지난 7월 2일 저녁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세번째 비상 시국미사에 참석하여 미국산 쇠고기 장관 고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촛불집회에 강경 대응하는 공권력을 규탄하는 미사를 드리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 촛불미사는 눈엣가시?


 그런데,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1일 오전 정기인사를 통해 촛불미사를 주도한 전종훈 사제단 대표신부에 대해 안식년 결정을 내렸다.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으면 보통 4~5년의 임기를 채우게 된다. 그러나 전 신부의 경우에는 고작 1년 6개월간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성당에서 봉직했을 뿐이다. 따라서 보통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임기를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안식년을 떠나지 않는다. 문제는 당초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단에서 전 신부에게 미국 LA 해외교포 사목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제안을 전 신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안식년을 떠나라 주문한 것이다.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종신서원한 전종훈 신부는 교회의 뜻에 따라 9월 1일부터 수락산성당을 떠나 지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무엇보다 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이 같은 일은 유신 때도 없던 일”이라며 “서울대교구의 정기인사지만 정상적인 절차로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일갈했다. 통상 신부들의 안식년은 교구와 논의를 통해 본인의 비전을 정하고 그에 따라 정하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 같은 절차가 생략됐다는 것이다. 특히 본인이 안식년을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무조건 ‘9월 1일까지 본당에서 떠나라’고 명한 것은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는 것. 따라서 일부 가톨릭 관계자들은 이번 인사에서 전종훈 신부가 안식년 발령을 받은 것은 사제단 대표신부로서 ‘촛불미사’를 주도한 상징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한다. “서울대교구 정기인사였기 때문에 청주교구 소속인 김인국 신부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사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인사 조치에 대해 전종훈 신부는 “내가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오늘 인사통지를 받았으니 앞으로 지낼 곳을 찾아봐야 한다”고 짧게 말했다.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갔다.

 

 ▲ 전종훈 신부가 지난 3월 5일 서울 상계동 수락산 성당에서 삼성특검에 대한 사제단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소식을 접한 문정현 원로신부는 21일 저녁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사제단의 사회적 역할이 크지만 교회 안에서는 이런 대접을 받는다”며 “영향력이 큰 만큼 박해도 받는 것”이라고 씁쓸해 했다. 이어 문 신부는 “촛불미사로 드러난 전종훈 신부의 활동이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눈에는 보기 좋지 않았던 모양”이라며 “30년 넘게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함께 써온 사제단의 기념비적 활동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신부는 또 “한 달 전쯤 전종훈 신부에 대한 교회 내부의 의견에 대해 얘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설마’ 했다”며 “외국은 안 가겠다는 게 본인의 뜻이니 국내에서 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가톨릭교회 내의 소장파 한 신부는 “정기인사라는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정상적 인사명령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전종훈 신부는 수락산 본당에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돼 아직 임기가 많이 남았는데, 본인이 해외출국을 거부하니까 결국 본당에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이어 이 신부는 “유신치하 등 역사적 고비마다 교회 내부에는 사제단의 역할을 방해하는 분들이 있었다”며 “국민들이 삼성 불법행위 규명운동과 촛불미사 등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왜 교구는 불편하게만 여기시는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고 개탄했다. 무엇보다 이 신부는 “교회가 세속의 정치놀음과 같은 무게로 사제들의 활동을 재단해서야 되겠느냐”며 “촛불미사 보복조처라면 너무나 속상한 일”이라고 가슴을 쳤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의 한 관계자는 “사제인사 발령은 매년 8월ㆍ11월ㆍ2월에 난다”며 “이번 정기인사에 포함된 사제는 모두 117명으로 그 가운데 유독 전종훈 신부 인사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단의 보다 구체적인 입장을 듣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노력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서울대교구 주교단의 대변인 격인 허영엽 신부와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강의 등의 이유로 연결되지 않았다. 천주교 역시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를 보여준 단적인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천주교 서울교구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재산을 감안한다면 정치권과 일정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말 갈 곳이 없는 이랜드ㆍ뉴코아 노동자들이 명동성당을 찾았다가 천막 강제 철거에다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을 때 사제단은 내부의 잘못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이것이 천주교가 지닌 한계다. 종교 상층부에 있는 자들을 성직자라 하지 않고 ‘정치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마이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