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합의서를 작성하면서....

녹색세상 2007. 6. 30. 12:39

  사고 발생 후 주치의사로 부터 ‘늑골 골절은 후유증은 없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지간하면 공상처리를 하려고 작정을 했다. 어떻게 된 판인지 사고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핵발전소 건설현장의 사고 처리 방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후배에게 물어봤더니 “형님, 여기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라 다른 건설 현장과는 영 딴판”이라며 “자기 기술이 있는 사람이 왜 이런 구석에 일 하러 오겠습니까? 오갈 데 없는 기술 없는 사람들이나 오다 보니 70년대 노무관리 방식이 판을 치는 곳”이라고 한다. 사고 처리는 시공사 안전과에 연락을 하면 대부분 바로 처리 여부를 알려주는데 그래도 늑장을 부리면 건설소 공사관리부에 다른 말은 하지 말고 그냥 ‘도와 달라는 말만 하면 된다’고 하기에 연락을 했음에도 책임 선에 있는 사람으로 부터 답변이 없어 공사관리부에 ‘도와주시면 고맙겠다’고 했더니 한 시간 내로 연락이 왔다. 말은 협조지만 내용은 ‘명령’인 발주처의 권한이 무서울 수밖에.....


  모 핵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해 찍혀 있는 탓인지 사장이 직접 병실로 전화를 했다. 바로 ‘모 부장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다급했던 모양이다. 온다는  '모 부장'은 안 오고 아무런 힘도 없고 일이 벌어지면 욕만 얻어먹는 안전과장과 사장 동생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항암 치료를 하러 가 못 와 병 문안을 왔다’는데 느낌이 탐색을 온 것 같다. 이런 저런 겉도는 말만 하고 내용 있는 말은 하나도 없어 의아하기만 했다. 사장 동생이란 사람이 왔는데 아무런 말이 없으니 내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사전 정지 작업을 하러 왔을 텐데 아무런 말이 없는지.....  이왕 왔으니 격식을 갖춰야 할 것 같아 병원 사무장에게 진료비 처리에 대해 말이라도 하라고 대면을 시켰다.


  그런데 온다는 살림꾼으로 부터 전화조차 없다. 직접 전화를 하기가 그래서 안전과장을 통해 다시 전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방치하다 보면 피해자가 지치도록 하는 전형적인 낙후된 수습방식이 몸에 베인 것 같아 금요일 오후 5시에 시공사 안전과로 전화를 해 "아무런 가시적인 답변이 없어 갑갑하다. 산재보험이 시공사 명의로 가입되어 있으니 안전사고 처리는 시공사가 책임 있는 답변을 해 줘야 하는데 피해자를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냐"고 했더니 30분이 되지 않아 “월요일 모 부장이 병원으로 간다”는 전화가 왔다. 참고 있으면 바보 되고, 가만있으면 대충 얼버무리는 전형적인 노가다판의 일 처리 방식에 정말 화가 났다.


  약속한 월요일 ‘모 부장’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점심시간을 맞춰왔지만 일부러 밥을 먹고 나갔다. 아무런 얘기도 오가지 않은 상태에서 괜히 밥 얻어먹고 나중에 이상한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생각은 않고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니다’며 물 타기를 한다. 그렇게 나오면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넘어가니 써 먹기 딱 좋은 수법임에 분명하다. 밥 한 그릇 사 주며 매달리면 녹기 마련인 게 인지상정 아닌가. 도장 받을 준비를 해 온 것 같아 바로 덥석 무는 것은 좋지 않아 '가족들과 상의한 후 연락 하겠다'며 일단 미루었다. 바로 물면 안 되는 협상의 기본이다. 근로계약서 작성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압박 차원에서 접수한 진정에 대한 취하를 요구하는데 작성해 온 내용은 사고에 대한 것이니 이게 노무관리 하는 것인지 아닌지 정말 갑갑하기 그지없는 구멍가게다. 아무 소득도 없이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아 노동청 담당자와 통화를 해 취하의사를 밝혔다. 보는 앞에서 하니 기분은 좋아 보였다. 물론 취하 여부도 ‘가족과 상의해서 하겠다’고 일단 못을 박고.


  아마도 이런 경우는 처음 겪어 보는 것 같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데 아직도 70년대 방식으로 현장 노동자들을 대하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2일 후 병원으로 찾아왔는데 합의서를 공증 하러 가자는데 ‘사고재발에 대해 피해자가 전혀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고압적인 내용의 문구가 보여 “사람 몸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것을 빼든지 3차 진료기관의 의학 소견이 있을 경우 예외로 한다는 것을 뒤에 붙이자”고 했더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합의서를 받아가야 하는데 탈이 나게 생겼으니 그야말로 대형사고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사고 합의를 이런 방식으로 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주치 의사에게 후유증에 대해 다시 확인을 하고, 불러 사고 부위의 현재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더니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니구나’는 모습이 보인다. 중학교 동기가 있는 법무법인으로 가서 공증을 했다. 진정취하서도 공증을 하자기에 ‘돈 낭비하지 말자’며 바로 노동부의 담당자와 통화를 한 후 취하서를 팩스로 보냈다. 입금 확인을 하고 일을 마친 후 병원 부근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아무리 내 돈이 아니지만 평소 먹지도 않는 비싼 음식 먹어 본들 소화도 안 될 테고 해서 편한 곳을 선택했다.


  책상물림만 한 인간처럼 생겨 노가다판 생리 전혀 모르는 놈으로 봤는데 잘못 걸려 고생 좀 했을 것이다. 이번의 내 일이 폐쇄된 핵발전소 건설현장의 노무관리 방식에 조금이라도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데..... 힘없고 의무만 잔뜩 있는 하청업체 실무자가 똥줄 빠지도록 마음고생은 했겠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해 권리를 찾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골절부위가 아물고 나면 삼복더위인데 더위에 약한 내가 살인적인대구 건설현장의 폭염을 견딜 수 있을지 갑갑하다. 적당한 대접만 해 주면 여름 나기는 딱 좋은 곳인데  갈 곳 없어 복귀 싸움을 하는 일이 안 생길지 모르겠다. 분명히 법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하지 않고 쟁취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현실이 갑갑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