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16년 만에 만난 옛 사랑

녹색세상 2006. 10. 5. 16:56

   7월 지방의 현장에 가 있을 때였습니다. 잠자리에 들 무렵 “형님, 민균이 형 세상 떠났답니다”는 말을 후배로부터 들었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을 할 수 없는 부위에 암이 전이 되어 말이 자연 요법이지 죽을 날 받아 놓고 기다린 셈이죠. 그 날 따라 온 몸에 한기가 들어 몸을 가누기가 귀찮을 정도로 안 좋아 인편으로 조의금을 보내고 쉬려고 했는데 모임에 나온 김에 장례식장이 가까운 영대병원이라 조문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부가 청년 시절 함께 세상을 고민하던 잘 아는 후배라 도저히 안 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상을 가는데 16년 전에 헤어진 청년시절 “윤희용 너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으니 까불지 마라”며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을 꼭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조문을 하고 아내 되는 후배에게 뭐라고 할 위로의 말이 없어 “이런 일이 생겨서 어쩌냐”는 말만하고 나왔습니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이 있어 인사를 하고 청년 시절 함께 한 역전의 용사들이 따로 모여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 가자마자 옛 사랑과 바로 눈을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서로가 너무 어색해 몸둘바를 모르겠더군요.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핑계를 대고 나갔습니다. 16년 만에 만났으니 그 어색함이 어떨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둘의 사정을 잘 아는 후배들이 “형님, 뭐 그리 어색해 합니까. 다 지난 시절 추억 속의 일인데”라며 위로를 하지만 왜 그리 어색한지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둘의 과거사에 얽힌 비리와 지금까지 사연을 잘 아는 목회하는 선배가 늦게 왔기에 “형님 ×××씨 왔는데 어색해 죽겠다”고 했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봐라, 살아 있으면 보게 된다는 말이 하나도 안 틀린다”며 너무 어색해 하지 말고 가서 얘기해 보라고 해서 30여 분 정도 머뭇거리다 ‘잘 지냈느냐’며 인사를 하고 다음에 기회 있거든 얼굴 한 번 보자고 말을 건네고 나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야무진 모습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더군요.


  연락처를 겨우 알아 “지난 시절 내가 여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어떻게 그런 말을 재미없게 전화로만 하느냐.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해야지”라며 면박을 주기에 마침 두 사람의 과거와 현대사를 모두 잘 아는 선배 내외분과 같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자그만 키임에도 불구하고 굽 높은 구두 절대 안 신고, 꾸밈없는 수수한 차림새는 변함이 없어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지난 시절의 필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내게 갑자기 사정이 생겨 잠시 대구를 떠나 있는 바람에 제대로 연락을 못했는데 선 본 후 한 달 만에 결혼했는데 결혼 이틀 전에 선배를 찾아와 “정말 일생을 함께 하는 동지로서 친구처럼 살고 싶었는데 마음을 너무 몰라주더라”며 대성통곡을 했다는 말이 떠올라 “당시 우리 집 사정이 동생의 장래가 달린 문제가 있어 남자의 그 꼴 난 자존심 때문에 서로 공유하지 못하고 상처를 줘서 정말 미안하다.”며 16년 만에 정식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자기 역시 연락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 처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갑자기 결혼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더군요. ‘뭐하며 사는 지 물었더니 “여름 과일 산지 경매를 한다”기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기에는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예전에도 생활력이 억측이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우리 사회 변혁운동을 하는 사람들 내부에서는 연애는 눈에 안 뜨이게 몰래 해야 하는 이상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청년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 많은 축에 드는 관계로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도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주로 남의 눈에 잘 안 뜨이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택시 타고 수성못이나 동촌유원지 같은 곳으로 날아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보를 말하면서도 대구 바닥에서는 아직 그런 잔재가 남아 있어 저 같은 돌아온 싱글은 맘에 두고 있는 여성 동지가 있다 해도 상대를 생각해 대 놓고 만나기가 부담스러운 게 현실입니다. (좋게 말하면 관심이지만 엄밀히 말해 사생활인데 잘못된 관행 중의 하나 임에 분명하죠.)


  둘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얘기하라며 선배 부부는 저녁만 먹고 가겠다고 하기에 둘만 있으면 눈물바다가 될 것 같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러지 말고 같이 있다 나가자’고 말하고 지난 시절 얘기하다 나왔습니다. 후배들이 지금 제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 “바보, 그런 사람 놓치고”이더군요. 다음 날 전화를 해 “살아 있으니 본다는 말이 맞네요. 재미있게 살아라”고 말하고 혹 내가 실수를 할지 모를 것 같아 전화번호는 지워 버렸습니다. 그 사람 역시 저와 비슷하게 가끔은 생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사람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추억 속의 인물을 15년 만에 만났으니 다시 다른 인연을 만날 날이 있으리라 생각을 해 봅니다. 못 된 짓 안 했기에 망정이지 상대의 가슴에 더 큰못을 박았다면 도저히 얼굴 들 수가 없었겠죠. 살아있으면 본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사십대 중반이 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정해야 하는 도덕적 잣대  (0) 2006.10.08
추억 여행을 다녀보십니까?  (0) 2006.10.07
보안사를 아십니까?  (0) 2006.10.03
사랑하는 딸 해린아.  (0) 2006.10.03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0) 200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