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국제

한미 FTA 저지 투쟁, 그 너머를 꿈꾸자(펌)

녹색세상 2006. 10. 3. 02:20
 

  오는 10월 한미 FTA 제4차 본협상을 앞두고, 전농을 비롯한 여러 민중단체들과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소속 시민사회단체들이 더 높은 수준의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특히 11월 22일 ‘100만 총봉기’를 기점으로 한 대항쟁을 준비하면서, 전국의 농민들은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세부적인 실천방침을 이미 세웠고 민주노총도 총파업을 결의하는 등, 지난 8월 이후 다소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한미 FTA 저지 투쟁의 ‘봉화’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듯하다.

 

  여기에서 새삼 한미 FTA의 문제점을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자료들이 제출되었고, 심지어 주류 경제학자들조차도 지금과 같은 방식의 한미 FTA 강행은 옳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정부가 아무리 우기고 본질을 은폐하려고 해도, 더 이상 우리 민중들을 속이기는 어렵다. ‘경제효과’니 ‘이해득실’ 등을 따지는 것도 이 문제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한미 FTA는 단순한 ‘경제협약’이 아닌, 정치와 경제를 통틀어 한국사회의 운명을 미국과 초국적 금융자본의 지배에 영구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1994년 1월 1일 새벽, “이제 그만!”을 외치며 치아파스 주 산악지대의 어둠 속에서 떨쳐일어나 자신들의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당당히 선언한 멕시코 사파티스타 농민군의 봉기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날은 미국이 사실상 주도한 북미 자유무역협정, 즉 나프타의 발효일이었다. 나프타의 발효는 멕시코 인디오 농민들에게는 사실상의 생존권 박탈, 즉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제 그만!” 그렇다. 이제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해 봉기를 준비하는 우리 한국의 민중들은, 단지 현재 미국과 노무현 정권의 ‘폭주’로 강행되고 있는 한미 FTA 협상을 중단시키는 것을 너머, 우리 전체 민중의 삶을 옥죄고 나날이 우리들 생존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에 대해 “이제 그만!”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우리 노동자, 농민, 모든 서민들의 삶은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지 않은가. 한미 FTA 저지 투쟁은 그 협상을 중단시키는 것, 그 너머를 꿈꾸는 투쟁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앞으로의 투쟁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투쟁의 과정에서 민중의 자급/자율/자치의 힘과 지혜를 아래로부터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지배자들이 ‘대오각성’해서 지금의 한미 FTA 협상을 전격 중단하고, ‘다른 정책’, 가령 좋은 자본주의, 좀더 부드러운 세계화로 선회할 것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자원-에너지에 대한 약탈, 가난한 나라와 모든 약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착취에 기반한 지금의 물질문명과 세계화 체제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그것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는 파국적 징후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날마다 드러나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한미 FTA조차도 그러한 파국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잠시라도 더 유지하려는 추악한 제국주의적 욕망(미국과 초국적 금융자본, 그리고 한국의 지배자들에게 공통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투쟁은 그러한 전지구적인 약탈과 착취 체제의 고리를 끊고, 전세계 민중들이 지구의 ‘한계’ 속에서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혁명적인 비전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땅과 자연에 기반한, 그리고 민중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토대를 둔 자급/자율/자치의 전망이 아니고서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요컨대 한미 FTA를 저지하는 우리의 투쟁은 그러한 다른 문명, 다른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도, 온전한 의미를 획득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지배자들에게 우리 민중에 대한 약탈과 착취를 제발 ‘부드럽게’ 해주는 방향으로 선회해달라고 ‘청원’하는 운동이 되어서는 안된다.


  민중의 자급/자율/자치는 하루아침에 우리에게 선물처럼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반한 민중의 자급/자율/자치의 힘과 지혜는 앞으로의 투쟁 속에서, 우리 민중 스스로, 아래로부터 복원하고 조직해야만 하는 실제적인 사회혁명의 과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공허한 구호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와 농민, 전민중이 우리들 생존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러나 당장 실현 가능한 문제와 부문들로부터 하나하나 조직하고 지난한 ‘실험’을 거쳐야만 하는 문제이다.


  특히 민중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과 식량을 민중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지키고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긴급하다. 공허한 구호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노-농연대, 추상적인 수준에서가 아닌 ‘형제자매애’에 기초한 노-농연대의 차원에서 우리는 농업과 식량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차근차근 조직해야 한다. 또 사회의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실현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 있다. 가령 노조와 농민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농산물의 직거래를 조직하는 것은, 단지 농업과 농민을 ‘보호’하는 의미를 넘어 먹거리의 생산과 유통을 시장의 독점이 아닌 민중 스스로의 계획과 통제로 전환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구경북 농업회생과 지역자치를 위한 사회연대(준)’ 홈페이지 http://www.dglocalfood.net 참고) 나아가 그것은 초국적 자본과 폭력적 국가기구와의 전투 속에서, 민중생존의 일차적 요건인 식량을 ‘바리케이드’ 이 쪽에 확보하고 방어하는 투쟁의 의미가 있다. 군량미를 확보하지 않은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최근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는, 오는 10월부터 민주노총 대구본부 산하 몇 개의 사업장 노조가 주말을 이용, 인근 경북지역 농민회와 연대하여 ‘한미 FTA 저지를 위한 노-농연대 농활’을 조직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향후 지역 농산물을 직거래하는 방식으로 사업장 내 급식을 전환하기 위한 준비 논의 속에서 이룬 일차적인 성과다. 여기에 참가하기로 한 지역의 노동자들은 이 농활을 통해 추수철 바쁜 농민형제들의 일손을 돕고, 한편으로 노조의 방송차량 등 장비를 지원해 농촌 마을 구석구석을 순회하는 ‘한미 FTA 저지 투쟁 선전전’을 함께하기로 했다. ‘학교급식 대구운동본부’에 참여하는 전교조 또한 최대한 여기에 함께할 것을 검토하는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이러한 노력은 아직은 비록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다. 그리고 날마다 터져나오는 수많은 긴급 사안들로 인해 그것이 어느 정도 실제적인 성과를 맺을지 아직은 불투명한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추상적인 수준에서, 하나의 당위적 구호로써만 논의되던 지역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가 좀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를 노동자-농민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결의가 한미 FTA 저지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고심 속에서, 동시에 장기적으로 지역 농산물 직거래를 통한 ‘지역식량체계’의 건설을 위한 논의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규모와 성과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미 FTA 투쟁을 저지하는 투쟁이 그것 자체를 넘어 민중의 자급/ 자율/자치, 상호부조와 연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신호’를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리만의 착시(錯視)는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 민중들에게는 절망과 패배감에 맞서 투쟁할 권리가 있으며, 새로운 사회에 대해 꿈꿀 ‘상상력’의 권리가 있다. 그리고 진정한 상상력은 ‘땅’과 ‘민중의 상호부조’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땅과자유 2006.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