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학자인 문익환을 거리 목회자로 만든 친구 장준하
1979년 우연한 기회에 ‘장준하 추모 문집’과 ‘돌베개’라는 장준한 선생의 자서전을 봤습니다. 갓 스물이 된 피라미 청년은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를 당한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는 영원한 앙숙이었습니다. 아니, 박정희의 약점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지라 눈의 가시였죠. 한국전 참전자인 팔순의 우리 아버지도 ‘장준하는 정말 인물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1962년 잡지 <사상계> 발행인으로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은 장준하 선생이 귀국 환영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53년 4월 부산 피란 때 나온 <사상계> 창간호 표지. (사진: 한겨레신문)
목회를 하신 부친은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로부터 찍혀 고생했고, 목사가 되려고 일본의 청산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일제의 압박 때문에 일본군 장교로 지원하면서 아내에게는 ‘탈출한다’는 암호를 야곱의 ‘돌베개’로 밝혔습니다. 훈련 중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의 일원으로 훈련을 받다 귀국하기까지 겪은 내용이 ‘돌베개’에 나옵니다. 임시정부가 치열한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망명객들의 노닥거리는 곳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항일운동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게 바로 드러납니다.
광복군이 국내 진입 작전을 세웠는데 불과 일주일 앞에 일제가 항복을 해 임시정부는 총 한방 쏘지 못한 쓰라림에 김구 주석은 애통해 했고, 미군정의 일방적인 통보로 늦게 주석 비서로 같이 귀국합니다. 백범 서거 후 정치판의 요청을 거절하고 마치지 못한 학업을 합니다. 조선신학교(한신대)에서 평생의 벗인 문익환을 만났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문익환은 유학을 갔다 온 후 신학자로 강단에 서고, 장준하는 다시 득세한 친일파들과 험난한 대립을 시작합니다.
1650년 내무부 장관 비서였으니 출세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곳에 있을 수 없다며 사상계란 잡지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전파합니다. 자유당의 하수인인 동대문사단의 정치 깡패 이정재도 건드리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 장준하입니다. 출판을 막기 위해 인쇄소 조판을 엎어 버리고, 인쇄한 책이 못 나가도록 하는 등 별 짓을 다 했으나 장준하의 뚝심을 막지 못했으니 보통 강단이 아니지요. 그 어려움을 혼자 버텼으니 정말 대단한 인물이죠.
동갑인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앙숙이었습니다. 일제 패망 후 끌려 온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접수하러 갔을 때 박정희는 그 때까지 일본군 장교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정희는 절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며 노골적으로 대들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옥중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박정희에게는 영원한 가시였습니다. 1975년 8월 17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의문사를 당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1945년 8월 첫 만남 때부터 비롯됐다. 장준하(왼쪽)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의 장교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오른쪽)는 일제 관동군 육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사진: 한겨레신문)
신학자에서 거리의 목회자가 된 문익환
친구인 장준하의 상을 치르던 날 가장 슬프게 대성통곡을 한 사람이 문익환 목사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한 채 골방에서 친구 장준하의 영정을 붙들고 있다 ‘이제 내가 장준하가 못 다간 길을 가겠다’며 신학자에서 거리의 목회자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택했습니다. 뛰어난 구약학 학자로 공동번역 성서 ‘시편은 문익환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거리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늦게 세상에 눈을 떴다고 아호를 ‘늦봄’이라 지었고, 아내인 박용길은 ‘봄길’이라 짓고 예언자로 가시밭길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인 문동환 목사보다 늦게 감옥을 갔음에도 징역살이를 가장 많이 한 재야 인사로 독재 정권은 거리의 목회자 문익환을 ‘감옥에 넣었다 풀어 주었다’를 반복합니다. 지금은 헛소리 해대는 뉴라이트의 김진홍 먹사도 “문 목사님은 갑갑한 감옥에서 그냥 있는 걸 못 봤다. 먼 산을 바라보다 시상을 떠 올릴 정도로 감성이 풍부한 분”이라고 할 정도로 내공이 깊습니다.
▲ 1994년 1월 19일 문익환 목사가 갑작스레 숨지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목요 집회 날’인 이튿날 오후 서울 탑골공원에서 추모집회를 열며 오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준비된 시대의 예언자이며 감성이 풍부한 시인
‘누가 이 민족을 구하러 나가겠는가’는 야훼하나님의 음성에 ‘주여, 제가 있습니다’며 응답한 이사야 선지자처럼 그는 준비된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전주 ㄱ 교회 의 모 목사처럼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동단결’만 말하는 녹음기가 아니라 가는 곳 마다 강연 내용이 다를 정도로 그 바쁜 와중에도 공부와 연구를 철저히 한 분이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세상 떠났을 때 같은 길을 가진 않은 연세드신 할머니들이 ‘하나님이 택한 분이라 이렇게 깨끗하게 데려 가셨다’고 할 정도로 일반 교인들의 조문이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노태우 정권 때 공안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평양 가기 전 후배인 재일교포 언론인 정경모 선생과 몇 십년 만에 만나 밤을 세워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벽이슬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봐야한다”며 자연 속에 깃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느낀 감성도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질 괴팍한 단점도 있었던 ‘문 고집’ 문익환
평양 방문을 결정하고서도 주저하자 아내인 박용길 장로는 “정말 실망했다. 내 남편이 그렇게 우유부단한 줄 몰랐다”며 오히려 결단을 촉구 했다니 부부가 대단하지요. 50대 중반이 넘어서야 예언자로 치열하가 살다 단 몇 시간 만에 유언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복을 타고난 어른이라 저는 감히 말합니다. 제가 존경하지만 정치적인 견해는 다르고 한계도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의제인 백기완과 싸우기도 했지만 이내 화해하며 웃는 아이같은 면도 있습니다.
▲ 1989년 3월 앞서거니 뒤서거니 북한을 방문한 정경모(맨 왼쪽)·문익환(왼쪽 둘째)·유원호(맨 오른쪽) 선생 일행과 황석영(오른쪽 둘째)씨는 27일 주석궁에서 김일성(가운데) 주석을 함께 만났다. 실향민 출신인 유씨는 문익환 목사가 ‘같이 평양가자’는 말 한 마디에 평양 길과 투옥 등 끝까지 행동을 같이했다. 문익환 목사가 아내에게 ‘나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라며 늘 미안해했다. (사진: 한겨레신문)
고집은 얼마나 센지 강의하다 성질나면 강의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릴 정도로 괴팍해 ‘문 고집’이라 부를 정도로 단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익환은 자신에게 주어 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한반도의 골고다 언덕’으로 향했습니다. 아내와는 한 번도 부부 싸움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한 사랑이 깊은 인물입니다. 자식같은 젊은이에게도 불편할 정도로 존대를 한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인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지만 않았어도 신학자로 남았을 분이 친구를 잃고 더 큰 일을 한 셈이지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친구인 윤동주 보다 시를 못 쓴 것과, 장준하 보다 용기와 기백이 없다는 열등감을 늘 안고 살았다니 정말 의아하지요. 그런 적당한 열등감이 늦게 시인이 되도록 했고,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를 한 큰 인물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세운 몇 안 되는 목회자 중의 한 분입니다. 아직 문익환 목사님 같은 시대의 어른을 보지 못했습니다.
덧 글: 지금 한신대학교 홈페이지에는 ‘늦봄 문익환 목사 기념비’가 나옵니다. 2년 전만해도 ‘장준하ㆍ문익환’을 배출한 학교‘라고 나왔습니다. 교권파 무당들이 돈으로 도배해 진보신학이 무너진 기장과 한신대이지만 장준하ㆍ문익환을 팔지 않고는 안 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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