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영화배우 문성근의 형 문호근의 고민

녹색세상 2010. 3. 16. 18:08

 

두 사람은 고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학창 시절 큰 아들인 호근이 공부도 더 잘 하고 인물도 좋아 아우인 성근은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한 거목인 아버지 때문에 어디가면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라고 해 늘 부담스러웠지요. 이름 난 아버지 때문에 장애물이 많았음은 물론이죠. “문익환 목사님의 큰 아들이고, 영화배우 문성근 씨의 형”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기는 가운데 끼어 불편하더라는 말에 사람들이 한 바탕 웃곤 했답니다.

 


문호근은 통일과 민주화에 일생을 바친 부친의 유업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2001년 5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까운 음악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문호근은 모 국립대에서 작곡을 가르친 교수로 정년이 보장되었음에도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연극 연출과 오페라연출가’로 활동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가 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말썽이 많았던 국립오페라단 단장이었던 소프라노 정은숙 교수가 아내입니다. “문호근 선생의 결단은 존중하지만 마누라가 돈 안 벌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에 한 바탕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등처가’나 ‘마피아라’라고 합니다. ‘마누라 등 처먹는 사람, 마누라 피 빨아 먹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 동생인 성근과 처지가 바뀌어 버렸지요.


성근은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한 미남의 형 때문에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어느 날 달라졌으니 하나님은 골고루 기회를 주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 어떻게 국립대 교수가 되었는지 의아하지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부모 몰래 음대에 원서를 작곡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름난 아버지 덕분에 유명세가 아닌 불이익을 받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워낙 실력이 뛰어나 자기 분야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다른 음악가들과 문호근은 달랐습니다. 재미있는(?) 오페라를 어떻게 하면 청중들에게 잘 전달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연출가로 활동할 당시에도 외국어인 오페라 가사를 우리말로 바꾸어 공연을 하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고 합니다. 차라리 원어 그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는 가수들에게도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가사가 이해되지 않는 오페라가 무슨 오페라냐’는 게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한 고집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친구 이건용과 함께 친일파들이 만든 음악을 찾아내고, 음악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거품이 잔뜩 끼어 대중들이 접근하기 힘든 고전음악의 대중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음악의 거품 제거’를 본격적으로 한 개척자였습니다. 그런 문호근은 한참 일할 나이인 55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친일파들이 지은 노래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어 민족정신을 배울 토대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문호근 같은 인물이 먼저 세상을 떠나 안타깝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