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윤 집사님은 ‘하나님보다 이웃 사랑’을 더 많이 하시네요.

녹색세상 2010. 3. 14. 22:05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별개인가?


캐나다 사람이 된 친구 부인으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성서를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저는 ‘하나님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고마운 말이지요. 캐나다 쪽 신학이 진보적이라 교회사를 공부하러 간 친구가 형편이 안 되어 공부를 접고 밥벌이를 하면서 교민들 2~30명이 현지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며 타향살이의 아픔도 나눈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로 신앙의 관점이 다른 걸 알기에 굳이 말하지 않고 피했습니다. 친구도 목사라 티를 더러 내어 다투기도 합니다. 이메일을 보면 안부가 아닌 설교문이라 “설교는 교회에서 해라. 난 너희 교회 교인이 아니다”고 사정없이 잘라버려 한 동안 연락도 안 하곤 합니다. 외국에서 산지 15년 가까이 되다 보니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인데 ‘잊혀 진 사람 같다’며 소외당한다고 오해하더군요.


친구라서 그런지 나이 쉰 줄에 접어들었는데도 서로 다투는 걸 보고 후배가 ‘형님은 아직도 최 목사와 싸우느냐’고 해 한 바탕 웃었습니다. 남 같으면 ‘그래 떠들어라’며 넘어가면 되지만 친구라 일부러 제동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목사 버릇 잡으려는 속셈도 있습니다. ^^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주님은 명토박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난한 어린 생명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


부자 청년이 찾아와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그대가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걸 우린 잘 압니다. 이 땅의 절반이 집이 없어 한 해 걸러 이사를 해야 하고, 전세금은 날로 뛰기만 하는데 내 집에서 편히 산다면 그게 과연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일까요? 갈수록 급식비를 못 내는 아이들이 많아지는데 내 자식만 걱정하며 살아가는 게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수시로 제 자신을 향해 질문합니다.


지금도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데 편히 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닌가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그들을 배척하지 말고 보듬어 안는 게 제가 하려는 진보정치라고 감히 고백합니다. 소외된 이웃 사랑이 신앙이고 진보정치지 별거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사회를 상대로 하는 목회’라고 사제인 후배가 말하더군요.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현실이 아닌 미래일지 모르나 그 날은 지금 우리를 향해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


신앙생활 30년 넘게 했음에도 믿음 좋은 분들이 많이 들었다는 하나님 음성 한 번도 못 들었지만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이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게 제대로 되려면 교회개혁이 필수입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사용하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교인들의 피 땀을 퍼붓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볼 보는데 써야 합니다. 교인들의 정성으로 목사들이 호의호식해서 되나요? 한국교회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교회가 제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란 걸 다 압니다. 그 일을 혼자 하면 불가능하지만 여럿이 하면 조금씩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개혁이란 큰 문제 앞에 작은 차이를 인정하는 아량만 겸비하면 엄청난 탄력이 붙습니다. ‘혼자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생명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의 말을 수시로 떠 올립니다. 교회개혁을 꿈꾸는 분들에게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노랫말을 전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해 하나 됨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