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내가 성서를 향해 질문을 계속 던지는 이유는?

녹색세상 2010. 3. 1. 01:37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가 옳다’는 고정관념과 자기 집착이 사회와 주변을 힘들게 합니다. 굳은 신념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는 이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앞으로 좋지요.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내가 가는 길이 맞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이 없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거지요.”

 

성서만큼 하느님을 향한 고백이 많은 지침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소중하고 귀한 그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만들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애 쓰려합니다. “성서가 이미 자명한 것으로 이해하면 성서 대신 독선과 아집에 빠지고 만다”고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성서 시각 교정 참고서’라고 부르는 ‘역사와 해석’ 서문에서 말했습니다. 청년 시절 누군가의 권유로 이 책을 사서 서문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르며, 그 때부터 저의 질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고민을 거듭하면 할수록 흔들리는 게 아니라 신앙의 뿌리는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더군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는 창세기의 고백을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1980년대 군대 마귀가 판을 치던 암울한 시절 거리에서 ‘전두환ㆍ노태우 물러가라’는 한 마디 외치려면 정말 고뇌에 찬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바로 국립호텔 행으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끌려가 수 없이 고문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백골단은 20대 초반의 연약한 여성들을 잡아 머리채를 흔들며 얼굴을 사정없이 길바닥에 짓이기곤 했습니다. 마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은 것이지요. 바로 눈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밟히는 걸 보고도 비겁하게 외면한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거리 예배(시위)가 끝나면 다치거나 끌려간 사람이 없는지 먼저 확인하던 신앙의 동지들로 끈끈한 정이 넘쳤습니다. 덮어 쓴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막걸리 마셨지만 마지막은 늘 ‘주기도’로 정리했습니다.

 

▲ 대구 앞산터널 반대 ‘나무 위 농성’을 할 때 사진. 높이 18미터 가량의 상수리나무 위에서 한 겨울 90여 일 가까이 기도하면서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귀한 생활이었다.


이제 대한민국 정부마저 저를 50대로 인정한 늙다리가 된 지금도 저는 그 시절의 기백을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몇 날 몇 일 고함을 질러도 쉬지 않고 쩌렁쩌렁하던 목소리와, 몇 시간씩 땀을 흘려도 ‘지치지 않던 체력의 절반만이라도 주시라’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지병을 앓던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원망하다 ‘네 은혜가 족하다’는 음성을 듣고 깨달았던 장면을 떠 올리는 횟수가 언제부터인지 많아 졌습니다. 저 역시 7년 넘게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벗 삼아 일생을 같이 할지 약 안 먹고 자는 날이 올지 알지 못합니다. ‘외상 후 장애, 공황 장애, 우울증’이 겹쳐 항우울제 성분이 강한 약물을 먹으면 바로 골아 떨어졌지만 새벽에는 악몽에 시달리다 깨던 아픔의 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잡니다. 그래서 저는 2004년 3월 31일부터 지금까지 헌혈을 한 번도 못했습니다. 완치된 후 약물을 복용한 기간만큼 시간이 지나야 헌혈이 가능하다는 말에 허탈하기 그지없더군요.

 

그래서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느냐’며 하나님 원망 정말 많이 했습니다. 밤이 무서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 굴하지 않았던 인간이 저녁만 되면 불안했으니까요. 그 때 성서를 폈더니 ‘지금 네 은혜가 족하다’는 구절이 보여 저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 후 저는 바울 서신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성서를 향한 저의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나처럼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신학적 관점이나 신앙의 형태를 존중해달라고 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인정만은 해달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없다고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소중하고 신학적 관점이 소중한 사람은 상대를 귀하게 대하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의 겸허한 자세라고 저는 배웠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지녀야 할 기본자세인 줄 압니다.


추 신: 맨 위의 말은 1,000일 칩거 기도를 마치고 거리로 나온 한 승려가 한 강연 중의 일부입니다. 비록 나와 종교 다르지만 참 좋아 인용해 보았습니다. 하나 더, 정보과 형사나 당원들로부터 ‘목회자 같은 분위기가 많이 든다’는 말을 듣는 건 제가 살아온 환경을 무시할수 없는 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