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현실은 외면하고 정절만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녹색세상 2010. 3. 18. 21:22

지난 날의 잘못부터 사죄하는 게 개혁의 순서


천주교는 100년 만인 2010년 3월 26일 명동대성당에선 정진석 추기경의 집전으로 안중근(1879~1910)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는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한국가톨릭의 최고 지도자가 명동대성당에서 천주교 차원의 공식적인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100년 만에 처음인데 참으로 비겁한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주교의 전파는 청나라를 통하기도 했지만 선교사들이 타고 들어온 제국주의 앞잡이 역할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개신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언더우드의 증손자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는 현실에 분노하는 민주시민들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언더우드가 구한말 엄청난 이권에 개입해 돈 벌이에 혈안이 되었고, 감리교에서 파송한 알렌은 미국 공사관 직원이었으니 거론하는 것 자체가 입만 아픈 일입니다. 조선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정책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보면 압니다.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데 서로 합의를 봅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선교사란 자들은 ‘조선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도하겠다’고 이토오 히로부미와 약속한 사실은 국사를 통해 배운 내용입니다. 일제의 침략에 “세상 권세에 따르고 선교사님들이 지도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죠. 안중근 의사에 대해 천주교가 100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를 합니다. 개신교야 말로 피눈물을 수 백 번 흘려도 모자랄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적극적인 무장투쟁이 아닌 ‘힘을 키워 훗날을 기약하자’는 다소 온건파입니다.

 

 

▲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10일 뤼순감옥 면회실에서 아우 정근ㆍ공근과 함께 면회 온 발렘 신부를 바라보며 유언을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자료 사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주님의 명령


그런 순한 안창호 같은 양반에게 언더우드가 ‘일본과 싸우지 마라’고 하다 화가 나 날린 주먹에 코뼈가 부러진 사건은 미국인 전도자들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선각자들의 의무임에도 현실론을 들먹이며 일본과 거래를 한 그들은 조선인들의 신앙을 ‘이 땅의 하느님 나라 확장’ 보다 ‘내세지향적인 신앙’으로 ‘죽어서 천국가는 것’으로 만드는데 앞장섭니다. 기미독립운동 후 교회가 변질한 게 증명합니다.


조선에도 디트리히 본훼퍼와 같은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많았습니다. 상동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들어 문맹퇴치 운동을 하고, 주일학교를 통해 어린 생명들에게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교회지하실에서는 무기조작법을 알려주는 등 교회가 투쟁에 함께 했습니다. 지금은 서울 중심가로 변해 큰 건물을 소유한 상동감리교회도 이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감리교의 골통삼총사 김홍도 형제도 이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사에서 사회 변혁에 교회가 앞장 선 몇 안 되는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저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싫고, 아무리 정당해도 특정 개인을 해치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이명박과 같은 악의 축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도려내는 것’이 정의라고 믿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정의를 심어라, 너희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선지자들을 통해 야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없는 부활의 영광은 명백한 사기


신약성서를 가장 먼저 기록한 바울 사도를 통해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고전13:6)”는 말씀으로 사랑의 원칙을 하나님은 명토박으셨습니다. 흔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성서 전체를 보지 않고 자기 입에 맞는 일부만 취사선택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통전적인 사고’를 하지 방해하는 먹사들이 써 먹는 수법이죠. 우리도 그런 곳에서 오래도록 생활하다 보니 익숙해 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모르고서 예수를 안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없이 부활의 영광만 이야기 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부분이지 교회가 세상의 전체일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국사회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임에도 교회는 문제를 치유하기는 커녕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종교를 가질 여유조차 없습니다. 일요일도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하는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심정을 교회는 알려 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란 칼 막스의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기독교는 살 길이 없습니다. 1980년 대 민중교회 운동은 전 세계가 주목했지만 교회가 살 길을 찾은 사례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교회는 늘 역사의 뒤안길에서 무임승차하는 비겁한 짓을 한 것에 대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지 훈수를 두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개혁운동의 출발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모순이 쌓인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고 잘잘못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개혁은 저 멀리 달아납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말씀을 아는 신앙인이라면 실천은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이지 선택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점심값을 못 내어 눈칫밥을 먹는 가난한 아이들이 늘린 현실을 외면하고 나만 편히 밥을 먹는 것은 분명 죄악입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준엄한 명령입니다.


덧 글: 저는 합법 정당의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는 ‘비폭력 저항’은 환상이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합니다. 미국 발 금융위기 후 경제난으로 고생한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민중들의 치열한 저항에서 보듯이 잘못한 권력에게 적극 대응해 싸우는 것은 권리이자 민주시민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당사자의 몫으로 놔두는 게 예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