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충실한 수족, 스스로 정권을 창출하기도 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보안사를 아느냐’고 물으면 ‘그 절이 어디 있는가요’라며 되묻는다고 한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변해 악명 높았던 보안사령부(현, 기무사)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생활 30년을 일관한 신뢰성이 전혀 없는 위험인물’, 지난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의 ‘사찰자료’에 올라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이 자료에는 1947년 5월 흥국해운 사장시절에서부터 1988년 12월 1일까지 40여 년 동안 김 전 대통령의 중요 활동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 재일 한국인 유학생이었던 김병진 씨는 84년 1월부터 86년 1월까지 보안사에 근무한 뒤 88년 보안사의 실체를 폭로하는 ‘보안사’를 펴냈다. 여기에는 전 현직 보안사 근무 군인들의 행정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이렇게 보안사령부의 불법 감시를 받아온 사람은 김 전 대통령 외에도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인사 1303명에 달했다. 윤석양 이병 사건의 여파로 당시 이상훈 국방장관과 조남풍 보안사령관이 물러났고, 보안사령부는 뼈를 깎는 개혁을 다짐하며 이름까지 기무사령부로 바꿔야 했다. 노태우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있었던 사건이다. 얼마나 정치적인 부담이 컸는가를 보여준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무(보안)사령부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기관은 찾기 힘들다. 이 기관은 최고 권력자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정권을 창출하기도 했다.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이 기관이 얼마나 권력 지향적인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 보안사의 막강한 정보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군부의 ‘12.12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후임자 역시 보안사령관 출신의 노태우였다. 보안사는 출세를 꿈꾸는 젊은 장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같은 병과에 근무하는 게 군대인데 보안사만 대령까지 근무하다 별 달고 전방 근무하다 다시 돌아올 정도로 막강한 권력집단이었다.
기무사령부의 뿌리는 미군정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11월 과도정부 국방사령부 정보과가 기무사의 효시다. 국방사령부 정보과는 다시 1946년 1월 조선경비대 정보과로, 5개월 뒤에는 정보처로 확대 개편된다. 군사 정보의 수집과 군내 방첩 활동 등이 주요 임무였다. 그리고 이 조직은 해방공간에서 격화된 좌우 대립 속에서 역할이 확대되어 정보처는 특별조사대(SIS), 방첩대를 거쳐 특무부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악명을 떨친 사람이 바로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부사관) 출신의 김창룡이었다. 한국전 당시 인민군의 ‘처단자 명단’ 제일 위에 오를 정도로 악랄했다.
군내 좌익세력 제거 명분으로 한 이른바 숙군과정에서 그는 미군 고문관들조차 ‘스네이크(뱀) 김’이란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 김창룡은 군내뿐 아니라 민간에 대한 정치사찰과 공작에도 관여한다. 특히 1949년 6월 발생한 김구 선생 암살사건의 범인 안두희는 직접 범행을 사주한 배후로 그를 지목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기간과 휴전직후 이승만 정권의 영속을 위해 특무대장 김창룡이 주역이 되어 조작했거나 과대 포장한 사건으로는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 ‘동해안 반란 사건’, ‘국가원수 암살음모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전시 수도 부산에 무장 게릴라 출현을 조작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이 대통령의 재집권을 성공시킨 사건은 그가 안보를 정치에 악용한 정치군인의 원조임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956년 1월 16일, 그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의 테러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에 이은 ‘제 2인자’로서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권력의 쉽게 유지하기 위한 이승만의 묵인이 있었음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그가 죽은 4년 뒤 일어난 ‘4.19 혁명’의 여파는 특무부대도 비켜가지 않았다.
▲ 이승만 대통령과 김창룡 특무대장 김창룡 특무대장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과잉충성을 부추기며 정적을 제거하고, 반대파를 정리하는 교활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새롭게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특무부대의 업무를 축소하고 이름도 방첩대로 환원한다. 군내 방첩 및 보안 업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는 국민의 염원 때문이었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다시 방첩대를 중용한다. 잇따른 반혁명 사건과 부정축재 사건 수사 등을 주도한 방첩부대는 신설된 중앙정보부와 함께 정권 안보의 보루로 자리 잡게 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군대를 철저히 감시해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면 사정없이 처단해 버렸다. 군대를 손아귀에 잡기 위한 도구로 악용했다.
1977년 육해군 보안부대 통합, 국군보안사령부 창설
‘1.21 사태’를 계기로 육군 방첩부대는 육군 보안사령부로, 해군과 공군의 방첩부대는 각각 해공군 보안부대로 바뀐다. 이렇게 각 군별로 나누어져 있던 보안부대가 통폐합 된 것은 1977년 10월 7일 국군보안사령부가 창설되면서였다.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1979년 3월 제 2대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그 해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된다. 대통령에게 총탄을 쏘았던 당사자가 중앙정보부장이었기에 전두환 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서 양대 정보기관을 모두 지휘하는 전무후무한 권력을 쥐게 된다.
그 이후 보안사령부는 ‘12.12 신군부 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5공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보안사를 거쳐 간 전두환, 노태우 두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 등도 모두 보안사 간부 출신이었다. 그 후 5공과 6공 정권 아래서 보안사는 야당 탄압, 언론 통폐합, 녹화 사업, 조작 간첩 사건 등을 자행하며 정권의 전위대로 악명을 떨친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 6과가 자리한 속칭 ‘서빙고 호텔’은 재야 운동가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였다.
수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학생과 노동운동가들이 이곳에 끌려가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 말기에 터진 윤석양 이병 사건은 보안사에게 다시 한 번의 변화를 강요한다. 윤 이병의 폭로로 백일하에 드러난 진실은 놀라웠다. 보안사는 사찰대상 인물을 AㆍBㆍCㆍD 4등급으로 분류해 월별로 주요활동을 기록했고, 사찰대상자들이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말을 하고 다녔는지를 샅샅이 캤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재정권의 음험하고 무자비한 인권 파괴 행위에 국민들은 치를 떨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보안사령부는 기무사령부로 개칭하면서 다시는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하지만 뼈를 깎겠다는 변신 선언 이후에도 기무사는 민간인 사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기무사가 지난 92년 8월 의문사한 노동운동가 박태순 씨가 활동한 노동운동 조직을 내사했고, 당시 기무사 요원이 박 씨의 자취방 등을 수색했다.”고 밝혔다. 2004년 10월에는 최규식 당시 열린 우리당 의원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기무사가 불법적으로 민간인에 대한 사상검증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당시 기무사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가 있다’며 이른바 ‘사상 검증기관’으로 불리는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문서에는 교과서에 수록된 유명 소설가의 작품이나 베스트셀러, 일간 신문에 실린 기고문 등도 포함되어 있어 충격을 주었다.
작년에는 기무사 첩보로 작성된 국방부 금지도서 지정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의 기무사’가 국민 정서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해 ‘5공 정권의 보안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국민의 기본권적 자유와 권리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오늘,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도록 없었던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를 다시 한 것은 사찰을 하라는 압력이다. 그래서 이명박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오마이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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