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날치기 언론악법은 언론보안법…노숙하는 민주주의

녹색세상 2009. 7. 24. 02:44

 

민주주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재벌과 조중동의 아가리에 공영 방송을 넘겨줌으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22일 날치기 불법으로 통과시킨 미디어 관련법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자유당 독재 정권의 사사오입 통과를 보는 것 같아 역사의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음을 두 눈으로 보았다. 국가의 주인으로서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서 재벌과 족벌언론의 방송을 그대로 수용할 것인가 선택만이 남았다. 재벌과 족벌언론에 방송을 넘겨준 미디어 개정법은 사실상 언론의 국가보안법, 즉 ‘언론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며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듯이, 이번 미디어법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인 여론의 다양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반민주적 악법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여론의 전체주의적 획일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국가보안법과 재벌방송법은 다를 바가 없다. 재벌과 족벌언론의 방송장악을 허용한 이번 ‘미디어보안법’은 해방이후 대표적 반민주 악법이다. 이승만 정권의 반공법을 시작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법, 그리고 이번 이명박 정권의 재벌방송법이 그러하다. 수구세력은 시대별로 민주주의 발전과 역사적 진보를 억압하는 대표적 반민주적 악법을 만들어왔다.


재벌과 족벌언론에 방송 헌납은 한나라당의 장기집권 계획


그 의도는 하나같이 장기집권을 위한 언론장악이고 여론조작이다. 독재의 유전자를 타고난 그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이웃 같은 편한 친구가 아니라, 바퀴벌레 같이 껄끄럽고 두려운 존재다. 지금 당장 시급히 처리해야할 민생법안도 아니면서, 더욱이 국민들의 압도적인 다수가 반대하는 재벌방송법을 한나라당이 무리하게 통과시킨 것은 오로지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일본식 장기집권 계획을 꾀하고 있음이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 한나라당 집권의 2대 지지기반인 재벌과 조중동의 족벌언론에 방송을 넘겨줌으로써 모든 여론 전달의 수단을 장악하려는 이번 수순은 첫 출발이다.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한 김형오 국회의장 스스로 “미디어법은 민생과 직결되는 법도 아니다. 이 법은 이른바 조중동 보수언론을 방송에 어떻게 참여시키느냐 하는 게 관건”이라고 밝혔다. 솔직한 고백이라기보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천명한 셈이다. 한나라당이 주장해온 방송통신융합시대에 맞춘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등은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고, 실제 속셈은 재벌과 족벌언론에 방송을 헌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권력은 늘 언론부터 장악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독재 국가에서 언론장악은 한결같은 권력의 유혹이다.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도 그랬고, 이번에 이명박 정권도 그랬다.

 


 이제 민주주의가 노숙하는 시대


재벌과 족벌언론의 방송 모습은 뻔하다. 그동안 우리는 일부 재벌신문이 자기 재벌을 비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재벌과 족벌언론의 방송장악은 이제 획일화된 여론만을 생산해 낼 것이다. 재벌방송 스스로의 내부 기사선택 기능에 의해 사회적 약자와 진보적 가치, 비판 여론은 자동적으로 걸러져 쓰레기처럼 분리되어 분리 수거되어 김포 매립지로 직행하게 될 것이다. 권력이 바라는 바고, 재벌도 추구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권력과 재벌의 이심전심이다. 재벌과 족벌언론에 장악된 방송은 이제 국민의 소리보다는 권력과 재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재벌방송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길거리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현대판 대자보가 난무하고 흉흉한 소문만이 인터넷을 통해 떠돌 것이다. 민중의 언로가 차단되면 민주주의는 노숙할 수밖에 없다. 재벌과 족벌언론이 방송까지 장악한 다음 순서는 권력 장악이다. 끔찍한 각본이지만 이미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현실이다. 재벌로서 방송사까지 소유한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태국의 탁신 전 총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거나 부정부패혐의로 쫓겨났다. 우리나라에도 조만간 자본과 언론, 권력까지 장악한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다.


기업의 경영 비리를 비판했다고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광고탄압으로 대응하는 삼성의 행태를 보면서 우려했던 현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제 방송이 아예 재벌의 품안으로 들어갔으니 언론의 기본적 책무인 권력과 자본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재벌의 영향력이 전 방위적으로 커지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초래되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잡아먹는 사회에서 재벌의 방송장악은 권력의 직접적인 언론통제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위기다. 재벌에 방송을 넘겨준 이번 미디어법은 자본을 통한 간접적인 언론통제의 시도로, 사회적 저항을 줄이면서 언론을 장악하려는 수구세력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재벌방송의 ‘미디어보안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량살상무기


획일화된 여론만이 전달되는 언론장악의 합법적인 장치라는 점에서, 이번 미디어법을 언론의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는 이유다. 국가보안법이 지난 60년 동안 얼마나 우리를 옥죄어 왔는가.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부터 인권과 민주주의 억압의 장치로서. 이제 여론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부정하는 이번 ‘언론보안법’은 우리 사회에 국가보안법 못지않은 폐해를 가져올 것이다. 국가보안법으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법적 토대 위에, 또다시 언론의 자유와 여론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재벌방송의 보안법이 등장함으로써 이제 대한민국은 수구독점의 세상이 되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연 ‘한나라당 불법대리투표·재투표 원천무효 선포대회’ 참가자들이 ‘언론악법 폐기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일제히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한겨레신문)


이명박 정권 들어서 ‘악마적 파괴’에 가까운 민주주의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재벌방송은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량살상무기와 같은 재앙이다. 언론을 장악한 정권과 한나라당은 이제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권위주의의 고속도로를 질주할 것이다. 국민의 통제에서 벗어난, 견제 없는 권력의 무서움을 우리는 이제부터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아마 무섭고도 소름끼치는 오토바이 폭주족의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경찰도 단속하지 못하는 폭주족의 오토바이 시동소리와 굉음이 벌써부터 들리지 않는가?


한나라당은 비판 여론을 의식해 이번 미디어법 개정에 여론 독과점 방지 장치를 마련했다고 둘러대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재벌과 조중동의 족벌언론이 방송을 장악하도록 한 그 자체가 최고의 여론 독점을 허용한 것인데, 시청점유율 제한이니 하는 부차적인 조항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민주주의의 핵심은 여론의 다양성이다. 한나라당도 여론 독과점이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재벌과 족벌신문사가 방송을 장악하도록 하는 미디어법 자체를 상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신문과 방송의 분리, 재벌의 언론 진출 규제만큼 확실한 여론 독과점 방지 장치는 없기 때문이다.


신문방송 겸영 허용하는 외국도 기준은 여론독과점 방지 여부


신문과 방송이 서로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만큼 확실한 여론 독과점 방지와 언론 횡포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제 대한민국에서 언론의 상호견제 기능은 사라졌다. 신문과 방송의 통합으로 언론의 독점적 카르텔이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상품도 시장에서 공정한 거래를 위해 독과점은 철저히 금지하는데, 거꾸로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여론의 독과점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엄격한 조건에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는 미국과 영국 등 외국 선진국의 경우에도 동일 지역 내에서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하는 등 여론 독과점을 우려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여론독과점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 나라의 역사와 언론 환경에 따라서 미디어법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기준은 여론 독과점 방지여부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문화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상영제)가 필요하듯이,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재벌과 신문의 방송장악을 어떤 경우에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여론의 다양성과 권력에 대한 견제라는 원칙이 지켜질 때 가능하다. 우리는 재벌과 족벌언론이 방송마저 장악하면, 여론 독과점을 예방할 수 있는 둑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봐라. 헌재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금지를 규정한 신문법에 대한 위헌심판에서 “언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필요한 한도 내의 제한이어서 신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할 수 없다”며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의 결정은 미디어법에서는 바로 여론의 다양성 보장이라는 민주주의 가치를 최우선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번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은 헌재의 이런 결정 취지도 완전히 뒤집는 위헌적인 도발 행위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신방 겸영의 규제를 완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여론 독과점 우려 때문에 반대했고,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도 신방 겸영의 확대 보다는 오히려 공영방송의 공영성 강화에 치중하고 있다.


공영방송은 공영성 강화, 신문은 인쇄매체 활성화가 정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정권에 따라 편파방송 시비가 끊이지 않는 공영방송 체제에서, 민영방송마저 재벌과 족벌언론에게 넘어가게 되면 여론의 독과점을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방송과 신문은 이제 완벽하게 권력과 자본, 수구적 보수 세력에게 장악되는 셈이다. 외국의 사례를 형식만 보고 내용에는 눈을 감는 외눈박이 시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당연히 우리의 언론방향도 공영방송은 공영성을 강화하고, 인쇄매체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프랑스처럼 신문 구독료 지원과 세제 혜택을 통한 신문의 활성화를 모색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방송을 거대 신문사에 넘겨주는 신문과 방송의 독점적 통합이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공영방송과 신문의 동시 활성화가 정답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빗나갔다. 방송은 재벌과 족벌언론에 넘겨줌으로써 방송의 공공성은 훼손되고, 신문은 인쇄매체 자체의 활성화보다는 방송 진출을 통해 경영난을 타개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다. 방송의 공익성과 신문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잃게 되었다. 언론정책은 민주주의와 국가 정체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시장도 독과점을 막듯이 여론의 독과점을 완벽하게 예방할 수 없다면, 신문사와 재벌, 외국자본만큼은 절대 방송의 소유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민주주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민주당이 할 일은 명백하다. 소수당의 설움을 한탄하며 한나라당을 욕하고 국민과 지지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인가, 아니면 책임 있는 정당으로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민주주의 사수에 나설 것인가.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장기집권 장식품 정당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고, 국회에 남아 한나라당에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기회주의적 행태는 용납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운명이 걸린 문제고, 민주당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재벌방송의 미디어법은 그 자체가 자유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법안이다.


민주당은 의원직 총사퇴와 전면적인 정권 퇴진운동에 나설 용기가 없으면, 아예 민주주의 사수의 이번 싸움에서 옆으로 빠져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번 싸움은 민주주의 마지노선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이명박 정권 및 한나라당과 국민의 전선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국회 안에서 어설프게 얼씬 거리는 것은 이명박 정권과 국민의 싸움의 전선을 흐리게 할 뿐이다.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미디어법 폐기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18대 국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어지는 전면적인 국회 거부 운동이다.


국회가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결국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나서서 지킬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일제의 침략 앞에 관병이 무기력할 때 의병이 나서는 것과 같다.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국민이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명박 정부와 국민과의 직접 전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수 없다. 총체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명박 정권과 주권자인 국민의 물러설 수 없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국민을 위해 정권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권을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인가? 재벌과 족벌언론에 방송을 헌납한 ‘언론보안법’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을 요구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