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쌍용차 방치…정의없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녹색세상 2009. 7. 15. 12:49

 

 

언론에서 쌍용차 사태에 대한 보도에서 ‘경찰이 출입문을 확보했다’는 식의 보도를 접하자 그냥 경악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확보’라니 마치 적군과 전쟁하는 아군에 대해 보도를 하는 모양입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거점’ 하나하나씩 확보해서 결국 진압하거나 박멸해야 할 국가 전복 집단이라도 되는가요? 참으로 잔인한 말투와 무자비한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무섭기만 합니다. 이 잔인성 이외에 커다란 문제는 여기에서 거의 1천 명이 되는 노동자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정의’ 그 자체가 짓밟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연간 7퍼센트씩 고속 성장한다 해도 정의 없는 나라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장 방문하는 것 조차 쌍용자동차 구사대들이 가로 막는 것은 정의가 아님에 분명합니다. 국회의원에 대한 의정활동 방해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경찰 역시 수수방관하며 모르쇠로 일관해 최소한의 법 조차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부동산 거품이 터져 마이너스 7퍼센트 성장이 안됐으면 좋겠지만, 성장이 되든 말든 인간들의 집단에 정의는 가장 먼저입니다. 정의의 개념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과실에 대한 엄중한 책임’과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 옥쇄파업 중인 쌍용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이 주말 경찰이 설치한 컨테이너를 통해 남편의 얼굴만 겨우 보고 있다. 최소한의 인도적인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밀어 붙이는 것은 정의가 없다는 증거다.

  

즉 대표적인 약자 집단인 피고용자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비록 책임의 일부분이 있다 치더라도 먼저 자본과 국가는 최대한 그들의 이해관계를 배려하는 것은 롤즈와 같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정의이지요. 그런데 이 쌍용자동차의 경우에는 해고라는 이름의 사회적인 생매장을 당하는 이들에게는 아예 이렇다 할 만한 책임지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 자동차 업계의 위기부터 정부가 허용, 추진한 상하이차에의 매각까지, 노동자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상황이거나 정부의 직무유기 격의 과실입니다. 즉, 약자에 대한 배려의 의무를 지는데다 과실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정부로서는 공적 자금 투입을 통해 해고를 막는 길 이외에 정의롭게 행동할 도리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도리를 하는 대신에 ‘공권력’, 즉 합법의 탈을 쓰는 폭력을 행사할 경우에는 과연 국가란 무엇이 될 것인가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정의 없는 국가’를 강도 조직이라고 불렀지요. 강도 조직이 통치 하는 영토 안에서 태생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탈출이라도 꿈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야 말로 정말로 큰일입니다. 쌍용차 노동자에게도 일생의 대불행이요 잘못하면 인생의 파괴지만, 나라 전체로서도 도덕적 파탄으로 이어지는 길이지요. 사실 국가란 원래 무엇을 통합시킬 만한 중심축 같은 게 필요하지요.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경우에는 근대 국가의 국민적 통합의 중심축은 천황이라는 신화이었는데,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쉬운 신화인 만큼 이와 같은 형식의 통합은 큰 불행을 자초했어요.


‘중화 민족 웅비’를 중심축으로 하는 오늘날 중국의 ‘인민통합’의 위험성이란 지금 위구르자치구에서의 피식민 민족에 대한 유혈 탄압을 보면 다들 알만 하지요. 아니면 ‘조선민족제일주의’와 ‘육탄이 되어서 불구대천의 원수 미제를 파괴하겠다.’는 걸 골수로 하는, 필연적으로 핵 무장 등의 군사주의적 낭비를 필요로 하는 북한 식 ‘인민 통합’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게 보이지요. 이와 대비해서 예컨대 북구 국가들의 국민 통합의 중심축은 ‘상호 양보, 타협, 그리고 인권 실현’일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에서 노동계급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포기한 게 문제지만, 어쨌든 적어도 국민 집단 안에서의 계급갈등 시 무력 사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갈등이 있으면 협상과 타협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런 나라의 해결 방식입니다. 미래 지향으로서의 공산 사회 건설을 포기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어쨌든 그 포기를 대가로 해서 얻은 이와 같은 ‘기본 설정’은 그나마 현존하는 사회적 체제로서는 가장 덜 나쁜 것이겠지요. 대한민국도 살만 한 곳이 되자면 이쪽으로 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터인데, 지금은 아주 정반대 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1990년대까지는 남한의 국민 집단 통합 이데올로기란 반공주의와 개발주의, 그리고 혈통주의적 민족주의의 중첩이었어요. 일부 농촌지역에서 국제결혼이 전체 결혼의 40퍼센트나 되는 이 시점에서는 단군 이야기는 일단 접게 되는 것이고, 부동산 경제의 몰락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부자 되기’ 이야기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전체 부동산의 65퍼센트를 소유하는 최고상류층 1퍼센트나 그 주변 집단을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경제적 희망이 있는 사람이란 극히 예외적이지요. 그러면 후자의 두 개 요소를 빼면 남은 게 뭐에요? 맞아요, 반공주의, 즉 ‘뉴라이트’ 식의 반북, 멸북, 북한 붕괴론 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군사주의적 국민주의에요. 그러니까 우리 국민 통합의 기초로 우리가 상생, 타협, 인권, 비폭력을 삼지 않는 이상, 여전히 이 국민 집단을 하나로 묶는 기초 구조란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북한이라는 적을 상대로 할 군대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부의 책임과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정의를 골자로 하는 온건 좌파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남은 게 이스라엘, 터키, 싱가포르 식의 군국형 국민 통합과 특히 이스라엘 식의 영속 전시 상태입니다. 물론 한국의 지배자들도 대북 전면전을 전혀 원하지도 않지만, 불장난하다가 또 무슨 사고가 일어날는지 전지전능하신 하늘만 아실 것이고요. 그러니까 쌍용차 노동자를 짓밟는 것은 결국 우리가 자멸적인 군사주의적 통합의 길을 걷는다는 징조지요. 차라리 망조라고나 할까요? 정의 없는 강도 조직 수준의 나라는 재앙을 맞게 돼 있고 궁극에 가서 망국을 맞게 돼 있습니다. 근대 일본의 예언자이자 함석헌의 스승 우찌무라 간조가 일본제국주의에게 한 소리인데 지금의 이명박 정권보고 해야 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박노자 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