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영원한 공주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가 청렴하다고?

녹색세상 2009. 5. 15. 09:46
 

대한민국을 19년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고,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그 악명 높은 박정희 가문에 대해 알아보자. 한마디로 박정희는 멋대로 마음대로 한 세상 풍미하면서 즐길 거 다 즐기고 해 볼 거 다 해보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이다. 물론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요즘도 무슨 빌딩 운운하며 그의 경제개발 업적을 지나치게 과대하면서 불가피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 때 좋지도 않은 머리로 귀찮게 한두 명도 아닌 그런 사람들이 억지논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그냥 이런 논문을 사안별로 딱 정리해놓고 있다가 필요할 때 긁어 붙이면 상황 끝이다.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모두 박정희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

 

 

 

박정희가 잘해서 경제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이다. 국민의 역량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봐야 한다. 흔히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은 필리핀과 달리 우수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부에 불과 했지만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좋은 바탕을 깔고 있었다. 여기에 국제적인 역학 구도로 중동 특수를 누렸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데 유리했다는 외부 여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6~70년대에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서 박정희의 공은 제한적이다.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상징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상 5.16 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점도 박정희 개인의 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대목이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이를 추진할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은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양적 성장은 정경유착, 각 부문의 불균형 성장, 관치금융 등 어두운 구석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박정희 시절 경제적 성과에서 차지하는 그의 기여도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양적 성장이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괄목할 만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고려하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잘하지 않았느냐’식의 ‘박정희 신화’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총점’을 똑 떨어지게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크기가 확연하게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박정희 신화의 실체는 ‘지도자의 역량과 대중의 역량을 혼동한 결과’라는 말이다. 또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제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사안이어서 경제 총점은 제각각 일 수밖에 없다. 시운까지 딱 들어맞았던 것이 주효한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이므로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 게 좋다.

 

다카키 마사오 시절 얘기 제쳐두고, 또한 여순사건 당시의 왔다리갔다리 행각 빼놓더라도, 박정권 19년만을 두고 평가해도 박정희의 죄악은 천지를 뒤덮고도 남을 양이다. 박정희 정권 전반기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후반기엔 긴급조치로 사람들을 조졌다. 물론 긴급조치 시절에도 급하면 국가보안법, 반공법의 미친 칼춤을 추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혁당 사건이다. 취약한 군사독재정권의 한계를 감추기 위해서, 저항하는 민주화세력을 빨간색으로 채색시켜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폭력집단으로 조작하여 일관되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나이 서른도 안 되어 잔혹하게 파멸당한 여정남 씨 얘기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고문을 많이 당했던지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형 선고를 하자마자 가족에서 알리지도 않은 채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고, 처형 후에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도 않고 서둘러 화장해 버렸다.

 

석방시켜 주거나 면회시켜 주거나 시신을 인도하면 그 잔학상이 드러나 정권이 파멸될 거 같으니까. 이런 개새끼들이 어디 있나? 이렇게 죽인 사람이 자그마치 여덟 명.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9명, 징역 12년 이상 선고받은 사람이 20명. 울화통 치민다. 그 딸은 그 죄악이나 빌 것이지 무슨 또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쳐대질 않나, 그 사법살인의 정점에 있던 자의 사위가 대한민국 최고 귀족에, 거대 족벌 언론사 사장이라니.... 나라꼴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박정희가 이데올로기 사슬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억울하게 몰아가지고 남의 인생 파괴하고, 그 집안 풍비박산 시킨 경우가 어디 한 둘인가? 박정희 정권은 국가테러리즘의 전형이었다. 제일 웃긴 것은 박정희가 스스로 깡패보다 더한 짓을 했으면서 깡패소탕 운운했으니 기가 차다. 박정희가 깡패들을 잡아서 바람직한 인간으로 선도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재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아니라 무식하게 군사적 규율을 살인적인 폭력으로 강요하면서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했다.

 

깡패보다도 못한 국가적 폭력을 자행했다. 그래서 새사람 만들었나? 이후 또 다시 깡패조직을 권력의 말단 행동대원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는가?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깡패를 써 먹고, 깡패짓 해도 되고,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국민재건 운운하면서 끌고 가서 마구 부려먹고 마구 때린 거 아닌가? 전두환이도 나중에 그거 흉내 내면서 사회정화를 떠벌렸다. 대가리에 들어있는 군국주의의 잔재가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금도 ‘그게 사나이답다’면서 침 질질 흘리는 사람들은 뭐야? 침 닦아!!! 전사모, 뭐야?? 박사모, 누구야?? 그 군홧발 아래 억울하게 희생당했을 힘없고 가엾은 약자들의 고통은 왜 안 보나? 유신체제 7년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으로 엮어서 감옥으로 끌고 간 청년 학생만 무려 1197명, 노동자 농민 275명, 성직자, 종교인 132명, 언론인 문인 84명, 선생님 52명, 정치인 70명, 기타 등등 1000명..... 유신체제 하 양심수 총 2704명. 김지하 시인이 당시 이렇게 말했다.


“반공법 제4조의 상투적, 견강부회적, 무차별적, 모략적 적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사상적,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빼앗아 온 최대의 질곡이며 우리 민중으로부터 '말의 자유'를 빼앗아 숨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패특권의 압제권력을 유지해 온 최대의 억압의 무기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머리 끝 부터 발끝가지 치 떨리는 분노로 항의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성의 허용,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몸으로 요구한다.”


그야말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인권유린의 구조화를 자행하여 한국사회 전체를 군사문화가 지배하는, 반민주적 독소로 가득 찬 사회로 만든 원흉이다. 박정희 덕분에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가기관들이 전부 인권유린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아직도 그 때문에 국민적 신뢰를 되찾지 못해서 고충을 겪는 것이다. 극악한 고문도 성행하였다.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 구타, 천장에 거꾸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벗기고 찬물에 집어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과 윤간 기타 성고문, 물 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박사모라니 정신 나간 인간들이다. 박정희의 전면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흡수된 거냐? 살인적인 인권탄압의 실상을 모르는 거냐? 망각의 해악인가? 민주주의가 그렇게 불만인가? 뭐야,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조용수 사장은 왜 죽었고, 작은 형의 친구이자 자기를 무척이나 귀여워 했던 황태성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고, 동백림 사건, 남민전 사건은 뭐야? 멧돼지는 어디로 갔나? 젊은 사람들이 왜 멀쩡히 있다가 감옥에서 옥사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 생각해 봐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무슨 부정선거 고발했다고 열차에서 떠밀어서 죽이지 않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운동하는 선교사에게 독약을 먹이질 않나, 대학교수를 잡아다가 창밖으로 집어 던지질 않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억울하게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결정된 사안만 보더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박근혜가 저렇게 정치판에서 설쳐댈 수가 없다. 이건 악마 중에도 대마왕이다. 악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박정희 향수라는 것은 결국 자기 가치파괴로 귀결될 게 뻔하다.

 

박근혜라는 여인도 불쌍한 여인이다. 박근혜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사건들의 진실에 대해 전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부친이 저지른 죄업을 모른 척 하면서, 또는 두둔하면서 그 죄를 씻기 위해 용서를 빌기는커녕 가해자 편에 서서 또 다시 민주세력에게 상처를 가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행한 자기 가치파괴로 결론이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박근혜도 박정희에 의해 빚어진 또 하나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박정희는 불법적인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후, 탈취한 권력을 악용해 끊임없이 추악하게 정권 연장을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최고권좌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가문도 엄청나게 번성시켰다. 무슨 박정희가 검소하고, 역대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고, 친인척을 멀리했다는 소리들을 그렇게 하는데 다 좆까는 소리다.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서 천황으로 살았는데 무슨 소리하는 건가? 정수장학회 얘기는 듣지도 못했나?

 

그 문란했던 사생활을 보고도 검소하고 청렴하다는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나? 친인척을 멀리하기는 뭘 멀리해? 쓸 수 있는 사람은 다 끌어다 한 자리씩 줬다. 당시 박정희 친인척비리가 불가사의하게도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다.우선 박정희의 딸 박재옥 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1931년 평남 안주 출신인데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대사, 캐나다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죽자마자 권력에서 멀어졌다. DJP연대로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개혁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위원장이 되는 등, 조금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친인척을 멀리한 건가? 그 다음에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을 보자. 그러니까 박정희는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다. 1941년 경북 구미 출신이다. 대구상고,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28살의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거 정상적인 건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또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을 보자. 1947년생이다. 경북 구미 출신이다. 계성고, 경희대 정외과,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요거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한 얘긴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지금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촌형인 박재홍과 맞붙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일제 치하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했으며, 해방 후 10월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아버지를 팔아먹고 전향한 대가치고는 너무 화려하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친인척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 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 그러니까 박근혜의 외삼촌인 육인수 같은 경우에도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씩이나 지낸 거 아닌가? 그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김종필 같은 경우에도 박정희를 끔찍이도 아꼈던 형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의 남편 아닌가?

 

박정희의 질서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 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다. 25년 전에 887억원이면 이건 계산이 불가능한 돈이다. 이래도 박정희가 깨끗하고 청렴한가? 그걸 몰라서 가만히 놔 둔 건가? 박정희 개인은 절대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르겠으나 박정희 덕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를 지배하고 있나?

 

정수장학회가 말이 장학회지, 그 규모가 1조 300억원에 이른다. MBC의 30%가 정수장학회 소유다. 부산일보도와 경향신문 사옥 부지도 등 엄청나다. 최근 영남대학교를 접수하려고 시기만 조절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또 어떻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나? 육영재단도 수천 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동생인 박지만과 서로 먹으려고 용역깡패까지 동원해 전쟁을 치렀다. 돈과 권력 앞에는 부모형제도 없다는 말이 딱 맞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나? 이게 청렴한 대통령의 표상이라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게다가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다던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 뿐 아니다. 박상희의 세째 딸 박금자를 총리실에서 근무하는 반기언과 혼인시키고, 결정적으로는 박상희의 막내 딸 박설자를 벽산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시켰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이 박설자로 말미암아 박정희 집안이 드디어 그랜드 서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질녀 박설자의 동서가 바로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다. 이 허영자의 조카사위, 그러니까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다.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은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거기 이사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거다. 게다가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나?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다 뻥이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겠다.

 

이상과 같이 해 줄만큼 다 해주고 해먹을 만큼 다 해 먹었다. 이래도 박정희 향수에 젖어 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 정신이라면 박근혜는 조용히 사는 게 여러 사람 도와주는 것이란 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럴 기미가 전혀 안 보이고 이명박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 챙기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