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

산재사고 그 악몽의 10년 세월

녹색세상 2009. 5. 13. 13:42
 

계속된 사고의 신호탄이 된 첫 산재사고


우리에게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계절’이 된지 오래되었다. 나에게도 5월은 ‘악몽의 계절’이 된지 10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1999년 5월 13일 11시 20분 무렵 경북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소재 대구-포항 고속도로 제5공구 현장 대구 방향 8번 교각에서 남의 일이었던 산재사고가 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누구보다 안전 수칙을 잘 지켰으나 그 첫 산재사고는 계속 이어진 사고의 신호탄이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전에는 거의 매일 헬스클럽에서 몇 시간씩 유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을 해 체력이 좋았고, 병원 출입도 별로 하지 않은 건강한 몸이었으나 산재 사고로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숫자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그 때의 시간까지 정확히 아는 것은 사고로 인해 받은 상처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시스템 서포트 연결봉에 살짝 끼었는데 피가 흐르기 시작해 약 18미터 높이를 바로 내려와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 후 검사를 한 의사는 “아저씨, 사고치고는 운이 좋습니다.”고 하기에 ‘누구 약 올리나’ 싶었는데 “손가락 관절을 1센티미터 벗어났으니 손가락 사용에는 큰 지장이 없다. 무엇보다 혈관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하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끼이는(협착) 사고는 절단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당황한 나머지 날아간 손가락을 그냥 두고 바로 병원으로와 다시 찾으러 가기도 하는데 ‘침착하게 대응한 것 같다’며 위로를 했다. “집이 대구니 대구로 가서 수술을 할 건지 여기서 할 건지 판단하라”고 해 빨리 하는 게 좋아 ‘바로 수술하자’고 했다.


거대 건설자본 대림산업과 기나긴 싸움 시작


그 때부터 국내 5대 건설자본인 대림산업과 산재 처리 문제로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주치의사는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정도도 갈 수 있다’고 하니 아무리 처음 겪는 일이지만 공상 처리로 해 합의할 사안이 아니란 판단이 들어 일주일 후 그들을 피해 고등학교 동기가 하는 병원으로 옮겼다. 대림산업이란 거대 건설자본이 피라미에 불과한 건설노동자의 산재 요양에 필요한 사업주 확인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아 승인을 받는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환자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산재상담 기관인 산업보건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요양 승인을 받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치료에 들어갔다. 근로복지공단의 진료 삭감과 요양 종결 압력에 맞서면서 법으로 보장한 권리마저 지키는 게 힘 드는 세상임을 직접 겪었다. 주치의사는 각도 조절 기계 치료가 필요하다고 함에도 ‘근로복지공단으로 부터 삭감 당한다.’며 치료를 거절하는 병원과 ‘전례가 없다’는 근로복지공단의 담당 직원과 불편한 몸으로 싸웠으니 힘든 시간이었다. 담당 직원의 횡포를 제압하고 나니 내가 접수하는 요양 연기는 무조건 통과되었다.

 

‘우는 놈 젖 준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아침에 치료 받고나면 할 게 없어 매일 산행을 하면서 건강을 다지고 오후에는 건축을 비롯한 각종 공부를 시작했다. 여름 방학 무렵 경북대 전산교육원에서 컴퓨터 교육이 있어 ‘지금 아니면 못 배우겠다’는 생각에 다친 손가락의 통증을 무릅쓰고 컴맹이 대학생들 틈에 끼어 힘들게 배웠다. 간도 크게 하루 2시간짜리를 신청했으니 따라가는 게 무리였다. 그래도 그 때 배운 덕분에 자판을 안 보고 칠 정도로 능숙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겹친 산재사고로 수시로 들락거린 병원


1년 동안 치료를 받고도 통증이 남아 있어 14급 9호인 최하 장애등급 판정을 받았다. 장애 판정을 하는데 자문의사가 ‘어디가 아프냐? 움직여 보라’며 ‘됐다’고 하기에 “당신이 아무리 전문가라 하지만 장애 판정을 이 따위로 하느냐”고 한바탕 했다. 괄괄하던 성미가 남아 있던 시절이라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고함지르자 근로복지공단의 직원들이 뛰어 나와 말리는 등 난리가 났다. 산재환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니 그렇게 총알 같이 판정을 한 그들이 의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요, 의대교수에다 수련의들을 지도하는 대학병원의 의사들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애등급을 받고 나서 대림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내용증명 몇 통으로 받아 냈다. 당시 거대 건설자본인 대림산업과 싸워 보상금 받은 사례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그 후 현장에 복귀했으나 공백이 많아 적응에 애를 먹었다. 얼마 안 가 산재사고를 당해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2004년은 우측 무릎 연골 수술을 하고 2년 후 좌측 무릎까지 했으니 남들은 한 번도 오르지 않는 수술대에 3번이나 올랐다.

 

그 와중에도 타고 가던 자전거 핸들 용접 부위가 부러져 도로 바닥에 나뒹굴어 목을 다치기도 하고, 건물에서 나오다 승용차에 부딪쳐 다치고, 추락 사고로 갈비뼈가 3개나 부러지는 등 사고는 꼬리를 물고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안전모에다 안전 장구를 착용한 덕분에 외상은 없었으니 천만다행이다. 남들은 재수 없다고 하지만 그 정도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리니 산재 요양 신청을 할 때 마다 진료 이력을 확인하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이 ‘이렇게 병원에 자주 갔느냐’며 혀를 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지경이니 정신인들 온전 할리 만무해 ‘우울증과 공황장애,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이 겹쳤다. 정신과 질환으로 산재요양 승인을 받기 어려운데 산재 사고가 겹쳐 발생한 것이라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아 긴 투병에 들어갔다. 잦은 사고로 입원하니 병 문안 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것 말고 책 사서 오라’고 주문을 했다. ‘형님에게 이 책이 필요하다’며 읽어보라고 권유한 후배들이 고맙기 그지없고, 그 때 각종 연수를 빠지지 않고 다녀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그리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사고가 겹치다 보니 안전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안전은 생명’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몸에 배었다. 어디를 가거나 가까운 곳에 등산을 가도 여행자보험을 꼭 가입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가져다 준 학습의 결과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것도 일일이 두들겨 봐야 하니 안전불감증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종’이란 소리 듣기 딱 좋다. 자전거용 안전모가 앞짱구가 심한 내 머리에 맞는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안전모를 쓰고 다니고, 바지가 체인에 걸리지 않도록 안전 각반도 착용하고, 미군들처럼 야광조끼에다 자전거 앞뒤로 충돌 방지등을 달고 다니니 요란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기에 다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같이 살 길을 모색하라!


2005년 강제로 산재종결을 당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의 산재 개악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이제는 정년퇴임한 경북대의대 정신과 강병조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같은 과 동료 교수가 각종 검사를 통해 내린 특진 소견을 딱 한 줄로 번복하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리 산재환자는 보상성 환자라 꾀병이 많다는 편견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할지라도, 동료의 진단 결과를 뒤엎는 경우는 의사들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임에도 태연하게 저지르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회 신고를 하고 상복을 입고 강 교수가 종일 진료하는 날 병원을 돌아다녀 온갖 수모를 당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들이 의사가 맞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되지 않아 나 홀로 소송을 하려니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당원이 있어 소장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처럼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소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임을 몸으로 체험했다. 재판부가 중재한 사실조회 신청조차 뒤엎는 것을 보고 사법부는 가진 자들의 편임을 알았다.

 

지난 10년간 사고로 얼룩졌으니 생활이 엉망임은 두말 하면 잔소리요 그로 인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렇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던 산재환자들의 고통과, 산재환자를 꾀병으로 몰아붙이는 권력과 자본의 횡포가 얼마나 악랄한지 겪고 보니 벼랑 끝에 내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본과 투쟁하다 유서를 쓰고 자살하는 노동자들에게 전에는 “죽을 용기로 투쟁하지 왜 그러느냐”고 건방을 떨었으나 이젠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할까’ 싶은 생각에 그냥 울기만 한다.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에 자살률 세계 1위라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치욕의 기록 속에 ‘내가 속할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권 이후 급증하는 산재환자들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명백한 타살이다. 노동을 하다 다쳤으니 치료는 물론이려니와 재활치료와 심리 치료를 해 현업에 복귀하도록 도와주는 게 자본과 권력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국가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같이 살 길을 찾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앞날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산재 사고와 각종 사고로 얼룩진 지난 10년의 세월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산재환자가 어느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