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앞산’이던 뭐든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말라고?

녹색세상 2009. 5. 4. 00:06

 

‘비판에 성역은 없다’고 믿기에 아무리 대안이 없다 할지라도 원칙을 갖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비판하라’고 감히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오래도록 유행하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대안 없는 비판 무용론’인데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함부로 사용했죠. 거꾸로 말하면 ‘제대로 된 대안이 없으면 비판을 하지 말고 입 다물어라’는 말이지요. 목숨을 걸고 천성산터널 반대한 지율이란 승려는 ‘대안이 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난 대안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원칙에 어긋난 것에 대한 저항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명쾌한 말입니다.

 

▲ 비판은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다. ‘대안없는 비판은 하지 마라’고 생떼를 쓰는 것은 강자의 논리일 뿐 우리는 원칙과 현재 상황을 말하면 된다.

 

 

숨어 있는 ‘제대로 된 것’이라는 수식어가 매우 중요한데 비판받는 쪽은 어떤 대안을 제시해도 ‘제대로 된 대안’이라고 받아들일 생각이 없지요. 비판의 목적이 대안 제시가 아닌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원칙에 부합된 것은 잘됐다고 하고, 원칙에 어긋났으면 잘못됐다고 하는 것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판의 핵심은 ‘원칙’과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것으로 원칙에 부합된 것은 잘됐다고 하고, 원칙에 어긋났으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바로 비판입니다.

 

비판을 비난과 혼돈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분명히 다르니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의 결과로 대안이 나온다면 비판하는 쪽이 마련하든 아니면 비판받는 쪽이 마련하든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비판을 받는 쪽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판자가 제시한 대안을 ‘우스갯거리’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시하면서 유신이라는 총칼을 휘두를 때, 살인마 전두환이 소위 ‘정의 사회 구현’을 주장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라고 했습니까?

 

이에 대해 그들은 ‘대안 없으면 비판하지 마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민주주의’나 ‘정의’라는 원칙을 슬쩍 접고서 ‘대안’쪽으로 관심을 돌려 놓고는 대안을 제시하면 총질이나 몽둥이로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지요. 그러니 ‘대안을 제시하라’는 요구는 ‘비판이 싫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제시하는 대안을 원칙에 비추어 검토할 용의가 전혀 없지요. 그럴 용의가 있다면 ‘대안을 제시하라’는 요구조차 하지 않습니다. 전 국토에 대한 삽질을 반대하며 대안까지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은 말장난을 하며 밀어 붙이는 것이 단적인 증거지요.

 

모든 비판이 이처럼 원칙을 밝히는 것이듯 ‘권력과 종교가 부패했다’는 비판은 그 자체로 족합니다. ‘정권과 교회의 원칙’이 무엇인지 밝혀만 준다면 말입니다. 사회복지에 대한 예산 배분과  십일조는 이러저러해야하고, 규모와 인력 문제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그런 사소한 대안은 백날 제시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런 대안을 실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토론을 위해서조차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판받는 쪽은 애당초 그걸 검토할 용의가 없습니다. 그걸 받아들이거나 검토하는 것 자체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자기 이익’을 훼손하기 때문이지요. 그저 비판받는 쪽은 최선의 대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원칙’에서 돌려서 ‘대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훨씬 쉬운 싸움이고 이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판을 하려면 대안에 대한 관심은 뒤로 미루고 자꾸 ‘원칙’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 태영건설이라는 천박한 건설자본과 한나라당의 하수인인 대구시가 파괴한 앞산 달비골, 국립공원인 전북 무주덕유산국립공원 만큼이나 많은 생물이 서식하고 있을 정도로 생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원칙’이라는 말을 아주 우습게 압니다. “원칙이란 책에는 써놓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적어도 지난 백 년 동안 한국 사회가 ‘원칙없는 사회’로 굴러 와서 그렇겠지요. 사실은 원칙을 말하면서도 그걸 철저히 외면해 버렸지요. 그래서 ‘원칙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하면 아주 우스운 사람이 돼 버립니다. 심지어 집단적으로 ‘무엇이 원칙인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까지 봉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사회가 좀 더 밝아지기 위해서는 그런 우스운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끈질지게 원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대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원칙이 없으면 나중에라도 대안이 나올 수 없으니까 말이죠. 지금처럼 원칙 알기를 우습게 알고 ‘대안’으로만 관심을 호도하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당분간은 ‘대안 없으면 비판도 하지 마라’는 우습기 그지없는 말이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원칙으로 돌아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겠지요.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일입니까? 귀 기울이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다 보면 원칙을 멀어지는 게 사람입니다.

 

그게 힘들면 실권을 장악한 쪽에 빌붙으면 됩니다. 물론 그럴 때에는 대안이든 비판이든 해서는 안 되지요. 내게도 떡고물이 떨어질 지도 모르니 비판할 필요가 아예 없겠습니다. 죄의식 느낄 필요조차 없습니다. 지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길로 들어서 있으니까요. 민자유치사업이란 이름의 괴물이 전 국토가 파괴되어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건설자본과 권력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니 기를 쓰고 일단 저지르고 봅니다.

 

그러면서 ‘땡빚내어 하는 공사’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원칙’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라’고 개 거품을 물고 있습니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사회복지 예산이 적다”는 현실 인식을 명확히 하고 문제 제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라’며 비판을 원천 봉쇄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이란 잘못된 것에 대한 원칙과 예산 분배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죠. 대안이 없다고 해서 기 죽지 말고 원칙과 현재 상황을 정확히 말하면 됩니다. 대안은 정책 입안자들이나 전문가들이 하면 되고, 그런 일 하라고 국민들이 피땀 흘려 낸 세금으로 먹여 살리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