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용산참사 100일을 맞는 유가족들의 찢어지는 가슴

녹색세상 2009. 4. 29. 11:33
 

 

이제 ‘용산 집단 살인 100일’이다. 한 겨울에 일어났던 용산 살인이 이제 계절은 바뀌어 봄이 되어  온 산과 들에 싹이 돋아나더니 어느새 그 꽃들은 신록으로 덮어 버렸다. 눈 내리는 겨울 엄동설한에 시작한 이 싸움은 봄의 절반 이상을 지나고 있으니 곧 여름을 볼지도 모른다. 1월 20일 새벽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일어났던 참사를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까?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유가족들이 추모객이 거의 끊긴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까도 의문이다. 그런데 다시 두 달을 넘어, 석 달, 이제는 100일을 맞게 되어 죄인이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목 놓아 울어도 시원하지 않은 유가족들의 피 말리는 100일, 아마도 유가족들에게는 한만 차곡 쌓인 100일이 되고 말았다.

 

▲ 엄동설한 새벽 추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철거민들이 농성하고 있는 망루에 사정없이 쏘아대는 살인을 저질렀다.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용산 집단 살인을 외면한 채 유가족과 전철연, 용산범대위를 고립ㆍ고사시키려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용산범대위가 제시한 5대 요구안에 대해 어떤 반응도 없이 그냥 무시할 뿐만 아니라 지쳐 나가떨어질 날을 기다리는 듯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틈만 나면 장례식장을 침탈하여 수배자를 잡아가려 난리를 치니 매일 이곳은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크고 작은 일로 경찰이 신경을 자극하여 비상이 걸리기 하루에도 여러 번이고, 그럴 때마다 항의하던 전철연 회원들이 연행되고, 구속되기도 한다. 이명박 정권은 2월 9일 검찰 수사 결과로 모든 게 끝났다는 태도에서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죽고, 여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은 입은 대 참사를 두고 ‘철거민 유죄, 경찰 무죄’라는 결론만을 내놓은 채 이를 믿으라고 강요했다.

 

 

더욱 가증 스러운 것은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을 이용하여 사건을 은폐하려고 청와대가 나서서 시도하지 않았던가. 용산범대위의 실무자들은 그날의 밤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하루 종일 남편이자 아버지인 가장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 구르던 유가족들을 기만하여 경찰서에 잡아놓은 사이에 검찰수사본부가 대규모로 꾸려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가족들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부검하기에 이르렀다. 군사독재 정권도 하지 않은 짓을 이명박 정권은 버젓이 저질렀다. 검찰이 알아서 과잉충성 하려고 이런 짓을 했다는 걸 과연 누가 믿을까? 기자들을 통해 시신이 순천향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달려온 유가족들에게 절차를 이유로 시신 확인조차 못하게 막던 경찰들, 그리고 끝내 날을 넘겨 새벽에서야 자신의 가족의 참혹하게 불에 탄 시신을 확인하고는 혼절하던 유가족의 모습, 그 지옥 같던 밤을 많은 사람들은 잊을 수 없다.


아직도 용산은 ‘전쟁’ 중


그러면서 떠나지 않은 의문은 과연 남일당 건물 철거민들의 농성 진압 작전이 김석기 당시 서울청장의 승인으로 진행되었을까? 최고책임자가 과연 서울경찰청장이었을까? 청와대는 사후에나 알았을까? 검찰의 대규모 수사본부도 검찰이 알아서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꾸린 것일까? 철거용역업체의 뒤에 재개발조합이 있고, 그 뒤에 사실은 삼성물산과 대림산업 같은 거대 건설자본이 웅크리고 앉아서 조종하고 있듯이, 검찰의 뒤에는, 경찰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떠날 수 없다. 평소 철거 지역은 무법천지로 심각한 인권 침해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용산4구역도 마찬가지로 덩치 큰 깡패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모욕과 협박은 공포로 다가왔다. 그때마다 경찰은 너무 멀리 있거나 용역들의 편이었다. 덩치 큰 깡패들에 폭행을 당하고도 오히려 철거민만 영업 방해니 폭행에 협박죄니 하는 등의 혐의로 경찰 소환 조사를 받고 사법 처리되기 일쑤다.

 

▲ 용산참사 희생자와 함께하는 부활 현장미사’가 4월 12일 오전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남일당 건물 앞에서 열려, 신부들이 유가족들에게 ‘부활 계란’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한겨레신문)


그런 끝에 철거민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방법이 방어용 망루농성이었다. 그 망루에서 몇 달이고 버티다 보면 조합이 협상하자고 들어오기 마련인 것이어서, 그때까지 버티기로 작정하고 오른 철거민들이다. 대화를 하자며 폭력을 피해 올라간 그들에게 어떤 대화나 설득과 협상도 없이 무력으로 진압해 버린 게 용산 참사다. 장기화될 수 있는 농성을 25시간 만에 특수임무 수행부대인 특공대까지 동원해 초강도의 진압작전을 과연 경찰이 세울 수 있을까? 박종환 전임 경찰종합학교 교장이 퇴임 인터뷰에서 지적하였듯이 경찰의 판단보다는 정치적 판단이 앞섰을 것이다. 정부는 현장에서는 경찰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지적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아직은 장례를 치를 수 없다


이러기에 100일을 맞으면서도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용산4구역에서 철거민들이 요구하던 소박하기만 한 이주 대책과 생계 대책이 전혀 마련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용산 참사를 겪은 이 와중에도 국회에서는 재개발 요건을 완화하는 재개발 관련법이 통과되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서울에만 뉴타운, 도심 재개발 사업 지역이 500군데가 넘고, 그곳에서 언제고 용산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살인 개발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지독하기만 전쟁에서 ‘법과 원칙을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은 늘 건설자본과 권력의 이익을 보호하는 도구일 뿐,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피눈물을 쥐어짜는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체계적인 국가폭력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용산에서 본다. 과연 무엇이 폭력인가, 전철연이 폭력집단인가? 그렇다면, 철거 현장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철거용역업체의 폭력은 방치되어도 좋고, 기껏해야 저항에 불과한 철거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폭력으로 매도하고,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는가?

 

▲ ‘사체부검은 유족들의 동의서가 필요없다’는 정병도 서울중앙지검 1차장의 말은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검찰은 처음부터 공정 수사를 할 의지가 없었음을 보여 주었다. (MBC PD수첩화면 캡쳐)


용산 살인을 보고도 아직 이 나라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국가라는 착각 속에 빠진 이들이 있다면, 민주주의국가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용산이란 이름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고, 집회ㆍ시위의 자유가 이처럼 철저하게 짓밟혀도 되는지 묻고 싶다. 용산범대위가 하는 집회는 100일 동안 다 한 건도 경찰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추모제를 치룬 죄 때문에 많은 이들이 소환되고, 구속되고 수배당하는 이 현실을 해명해 보라. 그래서 ‘용산’은 비켜갈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 수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사람 목숨 여섯이나 희생된 21세기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학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을까? 혹자는 먼저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이제 심신이 지쳐 있어 순간순간이 살얼음판인 유족들은 하루라도 빨리 장례를 치르고 이 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이 불안하기만 굴레를 벗기 위해서라도 간절하게 장례를 치루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사제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고, 아직도 사람들이 매일 현장을 찾아 촛불을 들고, 돈을 모으며 쌀과 김치를 보내고, 간절한 소망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먼저 용산 참사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현실을 처절하게 증언하는 용산 문제로부터 비켜나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없다. 용산 살인 100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하는 많은 이들의 연대의 물결을 보고 싶다. 살기 위해 올랐던 망루에서 죽어 내려온 그들을 잊고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박래군 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