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린아,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고 참 좋구나. 오늘은 봄의 문턱이라는 입춘인데 애비가 있는 달비골은 마치 초봄같이 포근하고 이름 모를 새 소리가 종일 들린단다. 몇 일 전만 해도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뿐이었는데 반갑게도 새가 와서 지저귀기 시작했어. 이제 북풍한설 몰아치던 엄동설한의 추위도 모퉁이를 돌아 달아날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 겨우내 얼었던 대동강 물도 녹고 어딘가에서 잠자던 개구리도 깨어난다는 우수ㆍ경칩도 머지않았으니 지금까지 몰아쳤던 앞산의 겨울은 달비골의 봄소식에 밀려가지 않을 재간이 없지. 아무리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한다 할지라도 겨울은 곧 사라지고 마는 게 자연의 이치요 섭리임을 믿는다.
요즘은 고종 동생 하은이와 안 다투고 잘 지내고 있니? 어릴 때 네가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맞고 울던 모습이 이 애비 눈에 선하구나. 네 물건도 챙기지 못하고 빼앗기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말야. 할머니는 외손녀인 하은이가 안 울어야 사위인 네 고모부 보기 덜 미안하다며 네가 ‘때리는 것 보다 맞는 게 속 편하다’고 하시는 가슴이 넓은 분이란다. ‘아들이 주는 밥은 앉아서 받지만 사위가 주는 밥은 서서 받는다’는 속담처럼 백년지객인 사위를 배려하는 마음이 큰 어른이라 그런 것이니 사랑이 깊은 해린이가 잘 이해하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딸 해린아.
왜 네 이름을 해린이라고 지은 줄 아니? 하늘의 해처럼 세상을 밝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지었단다. 해는 세상을 밝게 해 줄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병균도 말려서 없애 버리는 소중한 일도 하는 등 많은 일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야. 네가 태어났을 때 이 애비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몰랐어. 하느님에게 ‘너무 고맙다’는 기도를 늘 하곤 했어. ‘자식 낳아 키워 보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바로 가슴에 와 닿았어. 너를 키우면서 아제비라 그냥 좋아하고 귀여워 했던 조카ㆍ질녀들이 더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하더구나. 이제 인연이 끊겨 보지 못하는 네 오빠도 더 사랑스러웠음은 물론이고.
그래서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생명에 대한 사랑은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걸 네가 태어나고 나서야 깨달았어. 애비는 그런 소중한 기회를 준 네가 너무 고맙고 소중하기 그지없단다. 한글 이름이라 커서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서울 큰 집의 보라ㆍ정민이 언니들에게 “해린이라고 지으려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삼촌, 부르기도 좋고 뜻도 참 좋아요.”라고 하더구나. 네가 태어났을 때 애비의 후배들이 잔뜩 찾아와 장미 백송이를 선물하면서 잘 자라라고 축하를 해 다른 산모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네 엄마가 외가에서 몸조리 하고 올 때까지 못 봐서 서운해 할 정도로 좋아하고 아끼셨어. 그만큼 넌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소중한 존재란다.
사랑하는 딸 해린아.
애비는 청소년 시절부터 ‘자식하나 낳아 키우고 둘 셋 입양’하기로 늘 마음을 먹었어. 어린 생명을 파는 나라에 산다는 게 너무 부끄러워 우리만이라도 가슴으로 낳은 자식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하느님과 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엔 늘 빚으로 남아 있다. 연기자인 신애라ㆍ차인표 부부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고 할 때 마다 부럽기도 하고, 약속 어긴 죄인이라 지금도 자책감이 들 때가 많단다. ‘있는 자식도 제대로 못 키우면서 그런 소리 하느냐’고 나무라는 소리도 듣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그 꿈만은 버리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남들처럼 거두지 못해 미안하고 볼 낯이 없구나. 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녀라고 차별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너를 돌보시니 애비의 마음이 조금은 가볍단다.
어리기만 하던 네가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었구나. 사람이 태어나서 백일까지 몰라보게 자라고, 사춘기에 어떻게 자라고 변하는가에 따라 일생이 달라지는 것을 지금까지 많이 보고 듣고 있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면서 하루에 수 없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기도 하고, 장래 꿈도 열두 번 넘게 변하기도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했지만 슬기롭게 잘 헤쳐 나가리라 믿는다. 하늘의 해처럼 귀한 너와 못난 애비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어른이 계시다는 걸 잊지 말자꾸나. 애비에게는 신앙의 어머니신데 20대 후반 때 인연을 맺어 온 고마운 분이지. 자식 같은 사람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너희들이 뭘 아느냐’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는 삶의 지혜가 가득한 어른이란다.
애비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걸 아시고는 새벽마다 기도하신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 특히 네가 ‘하늘의 해 처럼 소중한 사람으로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온다할지라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자식에게 제대로 해 주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애비로서 꼭 부탁하고 싶은 두 가지는 해야겠구나. “나 보다 약한 사람을 아낄 줄 알고, 약속은 꼭 지키며 살아가라.”는 말을 말야. 사랑은 조건 없이 양보하고 참는 것이 맞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슬퍼해야 하는 게’ 먼저 되어야 해. 그 바탕이 안 되는 사랑은 사리 분별없는 욕심일 뿐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로 다툴 때가 있지만 약자와는 다투지 말고 손해 보더라도 양보했으면 좋겠다. 정 싸울 일이 있으면 너 보다 강한 놈과 머리 터지게 싸우더라도 약한 사람에게는 양보하고 물러설 줄 아는 아량이 네게는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싫은 소리 들을지라도 애초 하지 말고,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받는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라.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꼭 지켜야 남들이 너를 믿어준다는 걸 명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란 너이기에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애비는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가 있어 대구에서도 계절의 변화가 선명한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에 있다. 환경을 파괴하고 생명을 죽이는 짓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몸으로 막고 있다. 자식인 네게는 알려야 하지만 연세 많은데다 건강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걱정하실까봐 알리지 않은 걸 이해해 주려무나. 아신다고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화로 힘들게 할 사람들이 있어 알리지 않고 조용히 왔다. 하늘의 해 처럼 빛나고 소중한 내 딸, 너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기에 대구의 심장부를 파헤치려는 이 미친 짓에 맞서지 않을 수 없구나. 혼자 남더라도 끝까지 저항하려고 마음먹고 올라왔다.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네게 소홀할 수 밖에 없어 너무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기에 여기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해린아.
2009년 입춘 달비골에서 애비가
'환경과 생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을 거부하는 앞산을 둘러 싼 어둠과 겨울 세력에게 (0) | 2009.02.06 |
---|---|
나는 한나라당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유명 블로거? (0) | 2009.02.05 |
앞산 달비골에서 입춘에 전하는 소식 (0) | 2009.02.04 |
앞산 달비골에서 2월 첫째 화요일에 보내는 편지 (0) | 2009.02.03 |
앞산에서 전하는 서혜경의 아름다운 피아노 이야기 (0) | 2009.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