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앞산 상수리나무 위에서 겪은 정전사고

녹색세상 2009. 1. 5. 15:17
 

달비골 입산 18일째 간 밤의 정전 사고


어제는 새해 첫 일요일이라 등산객들이 많았습니다. 산을 좀 타는 사람들은 멀리가고 가볍게 친구나 가족들과 같이 오는 사람들이 주로 앞산을 찾습니다. 밖에 나가 사람들이 좀 보이면 몇 마디 약을 좀 파는데(?) 대부분 남의 일처럼 여기기 마련이죠. “터널 속에서 나오는 매연은 달비골을 죽음의 골짜기로 만든다.”고 해도 별 반응 없으니 ‘찜 맛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지요. 서울 북한산 관통 터널 저지 싸움처럼 등산객들의 10퍼센트만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갑갑할 때가 많습니다. 

 

 

다행인지 약발이 먹혀 등산로 입구에 자리 잡은 앞산꼭지들이 사업 차(?) 하는 어묵포장마차 옆에 걸린 ‘공사중지 명령문’을 만들어 놓은 현수막을 쳐다보며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뜨입니다. 이래서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걸음으로 가자는 것인데 간사한 게 인간의 마음이라 수시로 흔들리곤 합니다. 잠이 오지 않아 밤늦도록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이런 저런 고민도 해 가면서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 버렸습니다.

 

이럴 때 당황하면 안 되니 챙겨온 비상 전등을 찾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것마저 작동되지 않으니 난감해지더군요. 천막 입구의 차단기부터 확인 후 한 밤 중이지만 추위에 떨 엄두가 나지 않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래 천막은 이상 없다는데 전기는 안 들어오니 전체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지만 이러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부랴부랴 확인해 보니 누가 전기 스위치를 꺼 버렸습니다.

 

천막에 수시로 놀러오는 주민이 작은 천막에 있다가 나오면서 전기를 내렸다고 합니다. 날씨가 별로 안 추운데다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지 자칫하다간 동태 될 뻔 했습니다. 갑작스런 정전 사고로 실컷 작업해 놓은 자료가 날아가 버려 속은 상하지만 원망도 못하고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었죠. 이래서 최악의 상황을 늘 염두에 두자고 하는 저와 ‘너무 지나치다’는 주위 사람들이 부딪치곤 하지요. 몇 번이나 전기가 나가는 일이 있었지만 대부분 낮에 일어난 것이라 괜찮았지 한 밤 중에 정전 사고 나면 이 엄동설한에 정말 대책 없습니다. 

 

 

만약 평소처럼 그냥 잤더라면 감기란 불청객이 바로 찾아오고 말았겠죠. 올라오기 전 적응 훈련하다 2주 넘게 고생한 걸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상수리나무 위에서 감기를 앓는다는 것은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지요. 남들이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챙기고 다시 확인하는 이유는 버스도 안 들어오는 토목 현장이나 숙소에서 한 밤 중에 정전으로 고생해 본 게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설현장 중 특히 토목현장에는 ‘여름에도 겨울 옷 한 벌은 준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골 날씨라는 게 한 여름에 갑자기 우박이 내리기도 하고, 언제 기온이 확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해야 고생 덜 하기 마련이죠. 이런 준비 때문에 짐이 많아 고생은 하지만 아무리 날씨가 급변해도 추위에 떠는 일은 없습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는 어른들의 말씀과 최악의 상황을 수 없이 겪어 온 체험이 가져다 준 교훈이라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잠자리 들기 전에는 앉은뱅이 의자를 입구로 옮기고 그 위에 전열기를 얹어 놓아 기댈 곳이 없으니 자연스레 가부좌를 틀고 앉습니다.

 

가부좌를 틀야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30분쯤 되었을 무렵 다리가 저려오는데 견딜 수가 없더군요. 막힌 곳이 열려 기의 순환이 되면 저절로 풀리는데 상수리나무 위로 올라온 후 몸이 굳은 탓인지 불편해졌습니다. 억지로 참고 고비를 넘겨야 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죠.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걸 알면서도 자세를 바꿀 수도 없고, 견디자니 발에 쥐는 계속 나 답답하더군요. 이럴 땐 ‘무식이 용감’이라고 그냥 버티는 것 이상의 해결책이 없습니다.


견디다 보니 서서히 풀려기 시작해 괴롭히던 쥐는 사라지고 시원해져왔습니다. 이런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우리네 삶인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고비만 넘기면 내리막길이건만 그걸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려 뒤 후회 하는 걸 수시로 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닌 반복의 연속일 때가 많았다는 고백을 합니다. 올라온 지 2주가 넘었습니다. 목욕하지 못하는 불편함 말고는 견딜만한 걸 보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 같습니다. 고비를 못 넘겨 잃거나 놓친 게 많지는 않은지 아둔한 내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오늘 아침에도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30분이 되지 않아 쥐가 풀려 시원해졌습니다. 시원하고 소통이 잘 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 위 농성’ 23일 째 달빛고운 마을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