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오죽하면 선생이 저렇게 때렸을 거라고?

녹색세상 2008. 11. 29. 18:11
 

특목고 여학생이 선생한테 맞아서 입원했다는 뉴스를 봤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도부장을 했으니 교사들에게 매 맞을 일은 별로 없었으나 철이 들고 보니 내가 학원폭력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감투 덕분에 교사들에게 맞은 기억이 별로 없지만 남 이야기 같지 않은 악몽이 이런 내게도 있다. ‘왜 맞아야 하느냐’고 한 마디 했다고 죽도록 패고, 다시 교무실로 불러 ‘이 녀석 퇴학 시키라’고 학생부로 넘긴 것을 여러 번 봤다. 자기 분을 못 이겨 씩씩대며 볼을 때리는 게 아니라 아예 쳐 바르고, 발차기를 하던 인간 말종도 많았다. 떠든다고 중학교 1학년을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뺨을 때린 이진×란 파렴치한 인간의 그 얼굴을 나이 쉰이 되어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같이 장난을 쳤는데 판사 아들은 빼 주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한 손진×이란 교사의 치사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는 지금도 친구들과 만나면 ‘그 개새끼 말도 하지마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 후 손진×은 장학사를 그쳐 교장으로 퇴직한 것으로 안다.

 

   ▲ 교사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


내가 다닌 학교는 국립대 사대부설중학교라 해마다 교생 실습을 나온다. 자칭 국방전문가라 떠드는 수구골통인 친박연대의 송×선은 교생 실습 때 아이들이 떠든다고 불러내 뺨을 때리기도 했다. 아마 교생 실습 와서 학생 때린 건 내 기억으로는 전무후무하다. 졸업 후 바로 사대부중으로 발령 받아 1학년을 가르쳤는데 뺨 때리는 걸 예사로 한 인물로 후배들에게 물어보면 “형님 말도 하지 마세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고 한다. 폭력의 악몽이 얼마니 큰지 알 수 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라크 파병은 국가 이익을 위해 꼭 해야 한다’고 개 거품 물던 모습을 방송에서 보면서,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폭력이 얼마나 내재화 되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잘못했는지 묻지도 않고 걸리는 족족 쇠파이프로 사정없이 머리를 때린 황×구란 체육 교사에게 안 맞은 학생은 거의 없다. 이 인간 역시 장학사를 지내고 교장으로 퇴직했다고 들었다. 난 선도부장이라 개인적으로 맞는 것은 열외인 특혜를 누렸다.


여학생들은 치마가 짧아서, 남학생은 복장이 불량하고, 숙제를 안 해 와서, 체육복을 안 갖고 오고, 시험 성적이 나빠서 애들은 계속 맞았다. ‘귀싸대기’는 약과로 발로 차는 걸 넘어 자근자근 밟는 교사도 있었다. 아이들은 찍소리 못했다. 교사 폭력에 한 마디 한다는 건 ‘퇴학’ 당할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백한 폭력인 그 놈의 ‘주먹질’과 ‘발길질’도 사람 되라는 ‘사랑의 매’였다. ‘조폭 영화’처럼 맞아도 공부 잘하라고 때린 거라니 정말 웃기는 짓이다. 그 시절 교사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잡은 신이었다. 그럼 학생인 우리들은 뭘까? 과연 사람이 맞는지 고민할 틈도 없이 얻어터지면서 자랐고 맞으면서 그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 사춘기 시절을 보냈기에 우리 사회에 폭력이 난무할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한지 모른다.

 

  ▲ 교련교사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훈계를 듣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


고등학교 시절에는 박×태란 교감은 자기 눈에 걸리면 바로 뺨을 쳐 바른 것은 물론이고, 교칙 위반했다고 걸핏하면 퇴학시키기로 유명했다. 신설학교라 ‘처음에 기강 안 잡으면 엉망’이라며 학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색이 교감인데 직접 때린 건 이 인간 말고는 별로 없지 않을까 싶다. 신체 접촉 없이 야구 방망이로 시원하게 몇 대 맞는 것은 고비만 넘기면 되니 차라리 양반이었다. 별명이 뱀대가리란 교사는 기분 내키는 대로 학생 패기로 유명한데 수업 시작 전에 마실 음료수를 안 챙겨 놓으면 그 날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그런 짐승만도 못한 것들을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가? 쉰이 된 지금도 그런 인간들을 만나면 철저히 외면한다. 이런 나를 보고 누구는 ‘다 한 때이고 지나간 세월이니 잊어버리라’고 말하지만 잊을 수 없고 보는 순간 악몽이 떠올라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건 피해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때린 자가 지껄이는 변명과 핑계에 불과하다. 자랄 만큼 자랐지만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가? 키가 자란다고 상처가 오그라드는 건 아니다. 좋은 기억보다 아픈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아픈 기억은 잊혀 지지 않는다. 끄집어내 말하지 않고 기억의 냉동고에 집어넣어 놓고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의 냉동고는 있다.


누군가 학교에서 맞았단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마구 생각난다. 가슴이 뛰면서 내가 피해 학생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자식 같은 그 학생들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심장이 뛰곤 한다. 오늘도 아이들은 ‘여전히 맞으면서 죽어가는구나’는 생각에 치가 떨린다. 어느 특목고 학생이 교사에게 폭행당했다는 YTN 뉴스를 봤다. 학생은 눈 주위 뼈가 부러졌다. 전치 12주라는데 초진이 이 정도면 추가 진단을 포함하면 죽지 않은 게 다행이고 후유증이 없을지 걱정이다. 맞은 학생은 선생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고 쓰러지자 머리를 발로 밟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생은? 자신은 단지 뺨 한 대 돌발적으로 때렸다. 그것도 학생이 먼저 자기 뺨을 때려서 때린 거다. 그런데 학생이 그렇된 게 선생은 “학생이 넘어지며 다쳤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그 장면을 지켜 본 학생들은“학생이 넘어졌는데 선생이 막 밟고 그랬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이 체육 선생이 하는 말을 믿을만한가? 과연 그는 진실을 말한 걸까?


그런데 기사에 달린 댓글은 왜 “학생이 선생을 먼저 때렸다”며, “저 인간은 좀 더 크면 지 부모도 팰 것”이라고 흥분할까? 어떻게 슬쩍 뺨을 쳤는데 여고생이 넘어지며, 공교롭게 눈 주위 뼈가 부러질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그 교사는 뺨은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게 분명하니 직업을 바꿔 폭력청부업자로 직업을 바꾸면 대박 터진다. 뺨 맞고 쓰려져 다쳐도 가해자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모르면 교사 그만 두고 집으로 가라. 참으로 궁금하다. 학교는 왜 아직도 이렇게 폭력이 난무할까? 초등 2학년 아홉 살짜리를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들 만치 때려도 저 단순 징계 밖에 안 할까? 무슨 체벌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리는 폭행에, 사랑 타령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가정 폭력 가해자들이 한결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게 과연 ‘사랑의 폭력’이라면 당장 성격 장애부터 치료하고 장기간 정신과 치료를 해야 한다.


누군가 ‘교육은 마음의 일’이라고 했고, ‘감동을 주지 못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고 말한다. 날로 아이들의 일탈 행위가 거칠어지고 도를 넘어선다고 해도, 그들 역시 감동적인 교육을 받고 싶어 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체벌은 그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다가설 능력도, 함께 부대낄 마음가짐조차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교사의 부끄러운 고백은 아니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교육을 통해 우리 미래이자 희망인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으로 불가능한 일에서도 가능성을 보게 한다는 격려를 통해, 아이들이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사랑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을지언정 결코 폭력(체벌)을 통해서는 안 되는 일임은 분명하다. 체벌에는 감동이 실릴 수 없고, 정당방어는 있을지언정 ‘사랑의 폭력’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기 때문이다. “매질로 반성할 아이라면 말로 해도 충분히 알아듣고, 말로 해서 안 될 아이라면 아무리 매질을 해도 반성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어느 교사가 제자로부터 받은 편지 구절을 사족으로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