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사랑의 매란 폭력이 그리운 교사들은 좀 솔직해 지자.

녹색세상 2008. 11. 27. 00:26
 

지난 11월 3일, 79돌을 맞는 학생의 날(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이른바 학생인권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는 지난 2006년 3월, 당시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발의한 바 있는 같은 법률안의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학교에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학생 인권에 관한 조항이 담겨있다. 이를 두고 “학교 현장에 대한 엄정한 인식도 없이 내놓은 법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학생ㆍ교사 등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만든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사랑의 매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의 체벌 모습)


이에 대한 근거로 “학생들의 일탈행위가 갈수록 저학년화 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일탈행위에 교사로서 생활지도 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 것은 살피지도 않고 학생인권법안을 만들어 힘들게 하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이 자유로워지고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지면 “교사들은 무기력에 빠질 것이고 결국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니 “학생 체벌도 오히려 강화”할 것마저 요구하는 인권의식 천박을 사정없이 드러냈다.

 

학교 현장에는 이와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교사들이 의외로 많다.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가진 교사들도 많다. 현실이다. 학생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 학생이 인간 같으면 나중에 다 고마워한다는 말까지 친절하게 갖다 붙인다. 이것이 학교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체벌(폭력)의 근본 원리다. 그래서 교사의 폭력은 졸지에 ‘사랑의 매’로 둔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주장대로 두발 규제, 복장 단속, 가혹한 체벌로 다스리면 학생들의 일탈행위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가?

 

간혹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음성화된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사들이 더 잘 안다.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 더 내재화 될 뿐이다. 좀 솔직히 말하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학교 안에서 하는 흡연은 ‘학생부’라는 기관에서 충분히 엄하게 무시무시한 관리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학교 바깥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해당 학교의 교복을 입고 버젓이 담배를 물고 다니면 ‘학교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이유 때문에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피해 때문인가? 정말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은 학교 체면 운운하며 체벌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상시적인 금연지도 교육 운영과 지속적인 상담을 해야 한다. ‘담배는 백해무익’이라면 교사들부터 금연하는 모범을 보여야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책임은 생각 않고 일탈행위라 규정한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에 화살을 돌리는 건 정말 비겁하다.

 

“학생들의 일탈행위가 갈수록, 저학년화되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그것이 두발규제와 복장검사나 체벌의 정당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인과관계를 너무 잘못 짝지었다. 청소년의 일탈행위는 성장과정이나 환경 등의 문제이지 두발이나 복장규제와 체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제 학생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은 상식이며, 교사들은 수시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문제 학생에 대한 지도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게 학교와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행동이 흐트러지는 것은 그 제복을 입던 시절의 악몽이 남긴 무서운 정신적인 외상이 다시 드러난 것이다. 체벌을 주장하는 두발규제, 복장검사, 체벌 강화 등이 바로 그러한 원인에 해당한다. 학생들이 졸업식날 잔인할 정도로 갈기갈기 교복을 찢어버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지겨운 세월이었으면 자기가 입던 옷을 찢어 버리는 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운 학창시절이라면 버리라고 해도 고이 간직하고도 남을 것 아닌가? 지각했다고 군대처럼 원산폭격에다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복장이 불량하고 머리가 좀 길다고 불려가서 얻어터지는 게 학교 현실이다. 거기에다 성적이 좀 떨어지면 ‘정신차리라’며 폭력이 난무하는데 그 기억이 아름답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인권법안은 학교에 드리워진 그물을 조금 걷어내는 일


머리와 복장을 검사하고 체벌하는 일은 ‘생활지도’가 아니라 인권침해일 뿐이다.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알리고 더불어 함께 나누는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생활지도다. 거기에 머리가 좀 길면 어떻고, 교복 단추 하나가 풀어져 있으면 어떤가. 상투 틀고 쪽지고 다닌 조상님들이 얻은 명예가 ‘동방예의지국’이다. 그런 걸 문제아라고 낙인찍는 ‘잔인한 생활지도’부터 먼저 청산할 인권감수성 교육을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권영길 의원이 발의한 학생인권법안은 학교에 드리워진 그물을 조금 걷어내는 일이다.

 

너무 촘촘하고 견고해서 성어는 물론 치어들마저 모조리 잡아들이는 그물코를 조금 넓히려는 것일 뿐이다. 성어와 치어들이 마음껏 바다를 유영하는 그날까지 그물코를 넓히고 궁극적으로 걷어내는 일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 교사들은 “교권이 무너지면 학생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다.”며 학생인권법의 발의를 거부할 일이 아니다. 교사의 인권이나 학생의 인권은 똑같이 소중하고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교사(학교)보다 상대적 약자인 학생들의 인권이 지금보다 좀 더 존중받는 가치를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여전히 학생은 약자일 테지만. 그러기에 학생들의 권리는 더욱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인권의 주체’가 아닌 ‘통제와 보호의 대상’으로 취급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어리기 때문에 더 존중해주고 귀 기울여 들어주어야 한다. 존중 받는 교권의 출발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규제와 폭력으로 세운 교권은 언제나 땅바닥을 굴러다닐 수밖에 없으며 훗날 제자들로부터 결코 존경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재 학생들은 어른들이 겪었던 학창 시절과는 매우 다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갖고 있음”을 알면서 지난 시절의 폭력적 그물로 학생들을 통제하고 억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들의 미래들과 일생을 함께 해야 할 교사들이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인권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성세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교육 현장은 꿈을 꾸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해맑은 웃음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달려드는 아이들이 여전히 있고, 말없는 웃음으로 아이들의 꿈을 지켜보는 선생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군사훈련과 체벌이 공공연하던 지난 시절에 비한다면 훨씬 낭만적이고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 조금만 더 인권지수를 높여가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간다면 많은 교사들이 기꺼이 함께 하리라 믿는다. (오마이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