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대쪽 같은 아버지의 삶에서 배우는 지혜

녹색세상 2008. 11. 22. 23:22

 

우리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경우 바르고 남에게 거짓말을 못하는 분이다. 예전에 쌀집 해서 돈 안 번 사람이 없는데 되박을 못 속이는 아버지의 대쪽 같은 성품 때문에 우리 집은 돈 벌이는 커녕 겨우 밥 먹고 살았다. 남의 일을 자기 일보다 더 잘 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결벽에 가까운 성격이다. 거기에다 어려운 형제나 조카들을 보면 가만있지 못하고 집에 있는 대로 퍼 주셨다. 집에 현찰이 바닥 날 정도로 손이 큰 분이었으니 어머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증조부에서 백부까지 삼대가 두 집 살림을 했고, 백부님은 사십 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귀찮은 ‘두 집 살림’ 치다꺼리를 마다 않고 하셨다고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나 보다 다섯 살 위인 사촌 누님이 열아홉 어린 나이에 덜컹 애를 낳고 말았다. 예전에 피임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눈 맞아 성관계를 한 어둡던 시절에 생긴 일이다. 백부님이 안 계시니 ‘애비 없는 불쌍한 자식’이라며 늘 걱정한 질녀의 대형 사고에 가슴이 출렁거린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그래도 아들을 낳았다고 사돈 될 분이 ‘결혼 시키자’고 연락을 전해 오셨다. 중부 두 분은 체면 따진다고 서로 피했으나 아버지는 어릴 때 손가락 두 개나 잘린 질녀가 배운 것도 없으니 이 때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바로 해결사로 나섰다. 혼례도 간단히 해 양가에 부담을 최대한 줄이도록 깔끔하게 정리를 하셨다. 그 후 사촌 자형은 집안 경조사 때 아버지를 보면 멀리서 달려와 인사를 했음은 물론이다. 사장 어른도 아버지를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 없었다.

 

지금도 아버지 전화에는 꼼짝 못할 정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한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셨는데 손자인 내가 봐도 자형은 할머니께도 참 잘 했다. 술 한 잔 걸치면 자기는 배운 게 없다며 “공부한 처남들 보면 기가 죽는다”고 넋두리를 하기에 “우리가 그런 표시 낸 적이 없는데 그런 말 하면 자형 안 본다”고 했더니 “처남들의 그런 소탈한 게 좋다”며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어머니 바로 밑 외숙부는 동성동본 연애를 했는데 외숙모는 여고를 졸업했으니 겨우 국졸인 외삼촌이 봉 잡은 셈이다. 사고를 치고 나서 아버지를 찾아와 외조부께 ‘허락 좀 받아 달라’고 매달렸다.

 

밀양 박 씨야 한국 땅에 늘린 데다 이래저래 족보를 따져보니 너무 멀어 고민 끝에 아버지는 장인어른(외조부)을 찾아가 “엄밀히 말해 남인데 결혼 허락해 주시라”고 사정을 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사위지만 워낙 경우 바른 사람이 와서 매달리니 고집불통인 어른이 아는 사람들 통해 호적 세탁을 한 후 결혼을 시켰다. 외숙부는 그 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 말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우리 어린 시절 광산촌은 ‘개도 만 원 짜리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이 흔하기도 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온 막장 인생들은 거칠기 그지없었고, 술 한 잔 들어가면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광산하청업체 소장을 했으니 보통 성격이 넘는다.

 

수시로 이사 다녀야 하는 직업에 질린 외숙모는 조그만 식당이라도 하면서 정착하려고 대구로 나왔다. 그런데 이 불 같은 외숙부가 주방장이 애 먹인다고 바로 주먹을 날리는 사고가 벌어졌다. 주방장을 때렸으니 그 날 장사는 바로 끝장이라 외숙모는 바로 아버지에게 구원요청을 했다. 연락받자마자 바로 택시타고 달려가신 아버지는 바로 처남인 외숙부를 향해 “처남, 이게 무슨 짓이냐”며 바로 불호령을 날렸다. 어느 누구 말도 안 듣는 그 괴팍한 성격도 아버지 앞에는 바로 고양이 앞에 쥐다. 골이 날 대로 난 주방장을 겨우 달래고 ‘누구에게 함부로 손찌검이냐’며 외숙부는 크게 꾸지람을 듣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고 외숙모로부터 들었다.


작은 이모 결혼 때 함잡이가 애 먹인다고 두들겨 팰 정도로 별난 양반도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게 어린 나에게는 너무 신기만 했다. 개혼임에도 성질난다고 고함지르고 육두문자를 날릴 정도로 별난 큰아버지도 ‘형님, 이 좋은 날 그만하시라’며 바로 교통정리를 하셨다. 아무리 동생이지만 반듯한 사람의 말은 이처럼 권위가 있다는 것을 보면서 삶의 이치를 배웠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힘은 아버지의 지나칠 정도로 강직한 삶에서 나온다는 알았다. 외가에 제사가 있는 날은 만사를 제쳐 놓고 어머니를 보내시거나 같이 가곤 하니 아버지에게 뭐라 말이 없다.


우리 집은 항렬이 높아 삼종 형님들이 아버지 연배가 많다. 연배가 비슷하다 보니 명절이면 숙질 간에 술도 같이 하곤 하는데 의절한 형제도 아버지 앞에서는 서로 표시 안 내고 조심하는 걸 자주 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명절마다 큰 집에 갔는데 당신 백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게 늘 마음에 걸려 큰 집 조카들에게는 간섭은 커녕 질부들에게 따뜻한 정이 담긴 말을 건네곤 하는 걸 먼  발치에서 수시로 봤다. 제사 비용도 남들 안 볼 때 봉투를 건네시며 ‘질부 고생했다. 이것 밖에 안 되어 미안하다’는 말 외에 아버지는 집안 며느리들에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 않으셨다.


형수들도 아버지가 간다고 연락을 받으면 막걸리 좋아하신다고 꼭 챙겨드리고, 아침에는 해장국 끓이는 등 정성을 다해 “조카 놈들은 엉터린데 질부들이 영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지혜를 보여주셨다. 지금까지 효도 제대로 한 번 못하고 살아온 인간이지만 이 정도 사람 구실하며 사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와 예의범절 덕분이다. 못난 아들 때문에 얻은 병으로 고생하고 계신지라 더욱 뵐 면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