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멀리 떨어져 있던 친척들이 모여 같이 차례를 지내는데 종교적인 문제로 ‘절을 못하겠다’는 기독교(개신교) 신자들과 못 마땅해 하는 비신자 가족들이 다투는 모습을 지금도 봅니다. ‘야 이놈아, 넌 조상도 없느냐?’며 고함지르는 어른들과 ‘우상숭배라 절 할 수 없다’며 버티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꿋꿋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대치하는 장면을 집집마다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전통문화와 충돌하며 싸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상한 풍토이죠.
▲ 가족들과 같이 추석 차례(제사)를 지내는 모습 (사진:오마이뉴스)
고등학교 시절부터 종교를 가진 우리 형제는 “제사를 못 지내게 하는 것은 우리 풍습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최고의 예의 표시인 큰 절을 이해하지 못한 서양인들의 무지를 붙들고 있는 걸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며 ‘우상숭배’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명절이면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천주교의 경우 중국과 한반도로 들어온 ‘파리외방선교회’에서 제사라는 전통문화와 부딪치는 것을 보고 교황청에 건의를 해 ‘전통문화를 존중하라’는 칙령을 받은 후 해결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개신교는 ‘죽은 사람에게 무슨 절이냐’는 우격다짐이 대세인 근본주의 신앙이 판을 치면서 ‘제사(예배) 지내기 전에 다툰 이웃과 먼저 화해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큰 절에 대한 몰이해로 지금까지도 충동을 빚고 있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목사들은 ‘우상숭배 하지 마라’며 꼭 설교까지 해대는 게 현실입니다. 저희 형제의 경우 기독청년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우연히 던져준 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한완상 박사의 ‘저 낮은 곳을 향하여’란 책을 통해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을 이해하고 보니 명절에 싸울 일이 없었으니 정말 복 받은 셈이죠.
▲ 제사를 지낸 후 가족들이 성묘를 지내는 모습 (사진:오마이뉴스)
미국보다 먼저 여성목사를 배출할 정도로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감리교의 경우 1970년대에 ‘신앙의 토착화’를 고민하면서 우리 전통문화와 제례에 대한 연구를 해 천주교와 같이 ‘전통문화와 신앙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는 신학적 견해를 밝혔습니다. 무당 푸닥거리에 젖어 축복장사를 해대던 장돌뱅이 목사들은 ‘교회에 침투한 사탄’이라며 신학교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목사직까지 빼앗는 출교까지 저질렀습니다.
사춘기 시절 잘못된 관념에 빠져 제사 때 마다 서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진보ㆍ보수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심지어 학생ㆍ청년 운동을 한 진보진영의 사람들조차 제사 문제만은 기성교회의 틀을 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태껏 안 하다 다시 하려니 이상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전통문화와 접촉면을 넓히는 게 옳다고 봅니다.
찍혀 있었던 저희 형제들이 명절이나 묘사 때 아무 말 없이 절을 꼬박하니 어른들도 별 말 없고, 집안 형님들은 “동생 하느님 하고 인동 아지매(고모) 하느님하고는 다르제?”라는 우스개소리를 해 “형님, 고모 하느님과 저희 형제들 하느님은 급이 다릅니다”며 맞장구를 치자 좋아 하며 자식 같은 연배지만 같은 항렬의 동생들을 예우해 주곤 하셨습니다. 큰 절을 잘못 이해한 무지가 이렇게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의 관념을 지배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의문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마라’고 한 것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하느님과 같이 여기거나 높이 받들지 마라’는 것인데 이렇게 쉬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단순히 ‘우상에게 절하지 마라’는 그 글자에 얽매여 개신교가 전파된 지 120년이 넘도록 헤매고 있다는 것은 웃음꺼리요, 한국교회의 무지의 소산이라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우상을 국어사전(연세한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신과 같이 여겨 섬기는 대상. 맹목적으로 존경하는 대상’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과 동격에 놓거나 더 소중하게 받드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 있죠. 돈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자식에게 목숨을 거는 것은 바로 그게 우상이지 최고의 예의 표시인 큰 절을 하는 걸 우상이라고 우기는 것은 정말 무지의 소산입니다. 개신교도 교단에 따라 신학적 입장을 정리해 천주교처럼 ‘추도식’이라는 절충안이 나오긴 했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것에 불과하죠.
진보적이라는 목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제사 대신 추도식이라는 타협안을 선택해 빠져 나가는 게 현실입니다. ‘신앙의 토착화’를 목에 힘주어 말할 때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다는 단적인 증거 중의 하나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진보적이라는 목사와 신자들이 이 정도인데 남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 따로 목회와 삶 따로’라는 게 드러나는 극명한 사례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아마 변선환ㆍ서남동ㆍ안병무 같은 진보적이었던 신학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안 봐서 모르겠지만)
“제사(예배) 지내기 전에 먼저 원수 진 이웃과 화해하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것 보다 내용과 정성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절이나 처음 뵙는 어른께 큰 절을 올리는 게 최고의 예의라 ‘절만 잘 해도 절반은 따고 들어간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재배(절 두 번)를 해 산 사람과 구분하죠. 불가에서는 삼배를 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상대를 올리는 것으로 최고의 예법 중의 하나입니다.
예법인 절 때문에 지금까지 싸움이 벌어지는 한반도의 남녘 땅, 자신을 낮추어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가 판을 치는 한국교회, 상식이 아닌 무식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으로 잘못 주입시키고 있으니 정말 우스울 따름입니다. 무식이 결코 자랑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명절만 되면 화해가 아닌 싸움을 붙이는 한국교회의 무지가 언제 깨질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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