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남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님.
추석명절은 잘 보냈고 환절기에 잘 지내시는지요? 그렇게도 극성을 부리던 날씨도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수그러지고 만 것을 보니 계절의 변화라는 자연의 순리 앞에는 어느 누구도 꼼짝할 수 없는 가 봅니다. 대구를 가로지르는 신천만 가도 가을의 전령인 코스모스가 제법 자태를 뽐내고 있어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알려 주더군요. 이렇게 때가 되면 자기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이건만 우리네 인간들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며 난리를 떨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게 자신과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사십 대에 접어 들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기억 못하시겠지만 김수남 검사의 경대사대부중 1년 후배(31회)입니다. 학생회장을 한 김 선배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은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형편 좋은 집안의 아들답게 귀티도 나고 인정이 많아 후배들이 ‘수남이 형’이라고 매달리면 거절하는 법 없이 매점에서 뭣이든 사 주곤 하던 인정 많은 선배였습니다.
당시 학생회장이라면 어린 중학생이라도 선생님들도 대우를 해 주었고, 학생 대표라 힘 좀 쓰는 친구들도 꼼짝 못 했지요. 저는 대봉교 부근에 살았고 김 선배가 이천동에 살고 친구인 유병섭이 집이 옆이라 마주친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가끔 얼굴을 보곤 했던 것 같습니다. 김 선배는 대학시절 ‘국립 ㅅ대’를 다니면서 후배들을 챙겨준 고마운 선배라고 얘기 들었습니다. 선배가 잘 챙겨준 후배들과 우리 동기들은 가방 끈이 길어져 대부분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수남 선배가 검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1991년 5월25일 시위 중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인해 압사 사고를 당한 ‘김귀정 열사 부검’에 입회할 때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보니 검사들의 입회를 막는 사람들과 실랑이 하는 짙은 색 정장 차림의 젊은 검사 얼굴이 너무 낯이 익어 ‘어디서 봤는데’라며 기억을 더듬었는데 ‘김수남 검사’로 방송에 나오더군요. 김 선배 소식은 검찰에 근무하는 후배들을 통해 가끔 듣곤 했습니다.
울산과 창원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공안부 검사’로 주로 노동 관련 사건을 다루었고 계속 그 길로 승승장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흔이 넘어 변호사를 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요즘 잘 나가는 검사’라고 하더군요. 먹고 살기 바빠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광우병 정국’을 지나면서 ‘정당한 소비자 운동’의 일환으로 ‘영원한 찌라시’ 조중동 구독거부와, 광고 실은 기업의 불매운동을 한 네티즌들을 수사하는 책임자로 ‘3차장 김수남 검사’가 나오더군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비자금 폭로’ 사건 때 특검의 수사가 시작되기 전 검찰 담당자로 얼굴을 보기도 했지요. 검찰이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을 이끈 혐의(업무방해) 등으로 기소된 누리꾼들의 재판에서 증인을 자처하고 나서는 등 웃지 못 할 일이 21세기인 지금 대한민국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 책임자인 김수남 중앙지검 3차장이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 이림 부장판사 심리로 9월 17일 열린 첫 공판준비 기일에서 검찰은 지난 7월 인터넷 카페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운영진 출국금지 때 누리꾼들이 반발하며 인터넷에 올린 검사 이름과 검사실 직통번호를 증거로 신청했다고 ‘한겨레신문’에 나왔더군요. 검찰은 “검사실로 전화가 빗발쳐 일을 거의 할 수 없었다. 피해 업체들도 그랬을 것”이라며 ‘검찰이 산증인’이라고 신청 취지를 설명하는 재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는 등 한 편의 코미디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웃겼으니 칭찬을 해 줘야겠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너무 웃기는 인간들이 많아 남을 웃기는 게 직업인 희극배우들이 직업을 잃지는 않을지 걱정이네요. 지난 노무현 정권 초기 평검사들이 ‘대통령과 마짱’을 뜨는 등 뭔가 달라졌나 싶었는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더군요. 길어야 5년 짜리 권력인데 군사독재정권 시절처럼 ‘신공안정국’을 조성해 권력의 졸개 노릇하던 예전의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어 열 받은 국민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비록 촛불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쟁취하지는 못했다고 밀어 붙이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것을 공안기관은 명심해야 합니다. 조직 동원이 아닌 자발적으로 수 십 만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100여 일 넘게 저항한 것을 무시한다면 더 큰 저항에 부딪칠 수 밖에 없죠.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장기간 평화롭게 권력에 저항한 것을 보고 세계는 놀랐고. 아시아 민중들은 촛불의 방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수남 선배, 저는 솔직히 유럽의 ‘68혁명’처럼 사회 전체를 ‘갈아엎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래 말했으니 ‘체제전복 세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수십 만 명이 거리로 나와 장기간 촛불을 들고 평화적으로 싸웠으면 뭔가 가시적인 타협안이라도 나오는 게 상식이 통하는 사회 아닌가요? 어떻게 되먹었는지 이명박은 그냥 밀어 붙이기만 했죠. 어청수는 무덤에 있었던 백골단도 부활 시켜 ‘국민사냥’까지 하며 노골적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죠.
물론 그 배후에는 사라져 가던 ‘검찰의 공안통’들이 ‘임 향한 일편단심’으로 똘똘 뭉쳐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재기를 위해 부채질도 했지요.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나 있었던 합동수사본부를 가동 시키는 등 ‘신공안정국’을 조성해 물 만난 고기 마냥 설쳐대는 꼴이 가히 가관이더군요. 국회법사위에서 법무부 장관은 ‘경찰관이 공무 중 사고를 내도 면책을 주겠다’면서 타 부서 업무 과욕을 보여 ‘저 인간이 세상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로 거꾸로 돌린다’는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일에 제가 아는 인정 많고 후배들 잘 챙겼던 ‘수남이 형’이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나섰는지 가슴이 매 입니다. 이명박 정권은 검찰ㆍ경찰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왜 ‘수남이 형’이 앞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중앙지검 차장이니 곧 검사장으로 영전하겠군요. 삼성비자금 사건 때 적당히 물 타기 한 공로와 광우병 정국에 실적이 적지 않을 테니까요. 악역을 맡아도 이런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본다’는 옛말처럼 언젠가는 승승장구 출세한 김수남 검사를 볼 날이 있겠지요. 서로 서 있는 곳이 달라 많이 어색하고 불편할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검사장과 건설노동자가 같이 막걸리 잔 기울일 기회가 있겠습니까만 승진해 혹시 대구에 오시면 외면하지는 맙시다. 참, 저는 진보신당에 있고 지금까지 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제 머리 속에는 검사 김수남이 아닌 인정 많던 수남이 형이 떠오릅니다.
덧 글: 적당한 사진이 없어 ‘6.10항쟁’ 기념집회에서 ‘기념만 하지 말고 투쟁하자’며 새총을 든 게 찍혀 있어 올립니다. 고위 검사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라 미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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