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바람난 아내가족이라는 ‘제도’를 벗다

녹색세상 2008. 8. 24. 02:58

 

가족은 자연적인 것도 더구나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은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처럼 현실적이다. 가족제도를 철저하게 세속화한 ‘가족의 탄생’은 그 세속적 어긋남의 신호를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와 같은 문장 속에 집결시킨다. 그들은 불화하면서 조율하고 갈등하면서도 화해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싸움은 때늦은 깨우침에 대한 안타까움과 겹친다.

 

   ▲ 바람난 아내가족이라는 ‘제도’를 벗다. (사진: 한겨레신문)

 

그러나 ‘바람난 가족’은 가능한 변화와 조절을 염원하거나 기대하는 ‘가족의 탄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들이 불화하는 풍경은 시쳇말로 ‘쿨’해 보인다. 그 불화는 단지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불화, 그러므로 결코 기존의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불화가 아니다. (이 무능한 불화란, 가령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고참이자 친구인 태정의 존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승영의 항의가 결국은 불모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연상하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바람난 가족이 부린 불화의 생산성이 영화 속에 충분히 묘사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도적 틀에 응석을 부리는 불화의 종류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만큼은 분명 새롭다. 그렇기에 <가족의 탄생>이 “너 나한테 왜 그래?”라는 화두 속에서 움직였다면 <바람난 가족>의 화두는 앞으로 잘하겠다는 남편을 향해서 던지는 호정의 ‘쿨’한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당신, 아웃이야!”


바람난 아내가족이라는 ‘제도’를 벗다


가족 등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가장 값싼 장치는 물론 도덕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워낙 당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실상 도덕은 그 실체가 없는 것으로 제도와 더불어 합체를 이루지 못하면 곧 소멸하고 만다. 이를테면, 제도는 도덕의 신체인 셈이기에 현실의 제도 속에서 보호받고 재생산되지 못하는 도덕은 현실의 권력장(場)에서 퇴출된 채 기억 속에서 출몰하는 유령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도덕이 그 역사사회적 인위성(人爲性/人僞性)을 가린 채 자연스러운 규제력으로 사회구성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것이 왼손으로는 제도를 쥐고 있는 채로 오른손으로는 ‘양심’이라는 최종심급의 가상(假象)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애인의 성기를 왼손으로 쥔 채 오른손으로 그의 순정(純情)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이들처럼 말이다. 아무튼 도덕에 대한 잡다한 논의와는 별도로 그것은 확실한 사회적 힘이기에, 예를 들어 마광수나 장선우의 경우처럼 ‘양심’의 함량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이들도 결국 자신의 처신을 조금 ‘조심’하게 되긴 한다. 물론 양심적인 사람과 조심스러운 사람 중의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는 꽤나 짚어봄직한 문제는 아직 이 글의 관심이 아니다.


그런데 도덕이 당대의 제도와 결합한 현실적 힘이라는 사실 속에 이데올로기는 서식한다. 당대에 ‘눈치 보기’를 거부했던 니체와 같은 미래인들이 도덕의 저편과 선악을 넘어선 지경을 ‘눈치 없이’ 떠벌리는 것은 그러므로 넉넉히 이해할 만도 하다. 일상적으로 현실의 제도를 인준하고 좇게 만드는 최종심급의 장치는 대체로 도덕이므로, 적절한 제도로써 이 도덕을 선점하고 전유할 수 있는 기술과 인력은 당대를 지배하려는 세력에게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숱한 이데올로기 비판가들이 국가와 가족 사이의 제도적 공모를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종교나 국가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잡아놓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시장의 일차 타깃도 늘 가족인 것이다. 밀레트(K. Millett)에서 알튀세르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지적하듯이 적절하게 순치된 가족은 국가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단말기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제도가 된다. 그 제도를 감시 감독하는 원격의 장치가 곧 당대의 도덕이며, 많은 인류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이 입을 모으듯 그 도덕의 바닥에는 성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서열이 자리한다.


‘바람난 가족’은 바로 그 제목처럼 성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서열이 바뀌어가는 풍경과 그 사정을 잘 드러낸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는 우리같이 극히 도덕적인(?) 사회에서는 거의 정상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 남편에 대처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아내의 태도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아내는 조루(早漏)한 남편 곁에서 자위를 하고, 이웃집의 고딩에게 섹스를 가르치고, 바람기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아웃’(out)을 선언한다.


김영민의 영화와 인문


앞서 말한 대로, 아내는 기존의 제도적 틀을 온존시키는 데로 귀결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기존의 제도를 전제해서만 가능해지는 불화, “그러므로 결코 기존의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기존 제도와의 소모적 불화를 넘어 다른 생산성을 꿈꾸는 것일까? 그래서인가, 영화 말미에서 남편이 ‘잘할게!’라고 다가들자 아내는 “이 애기, 당신 애기 아니야!”라고 내뱉고 만다. 숱한 할리우드 영화의 맥 빠지고 매너리즘화한 귀결이 보여주듯 가족주의는 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마지막 종교이자 마지막 형이상학이 되고 말았다.


그 위태로운 사정은 한갓 제도에 불과한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심지어 도덕적인 것으로 꾸민다. 남성주의의 갖은 이데올로기가 집결된 가족의 울타리 안팎에서 여성의 반란이 성해방의 형식을 띤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된 지적이다. 그러나 불화와 일탈조차 체계 속으로 되먹임 하는 강고하기 그지없는 현실 속에서 그 힘겨운 반란이 새로운 현실을 불러낼 수 있는 생산성을 얻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여성해방은 어려운 숙제인지 모른다.


20세기의 여러 좌파 비평가들은 성해방과 성평등을 구체화시킬 성정치 이론들을 다각도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말리노프스키나 프롬 등이 말하는 모권제 사회의 이상도 요원한 일인 터에, 바람이 난다고 해방이 되는 것도 아니며 해방된다고 평등해지는 것도 아니다. 지속가능한 불화는 오직 창의적이어야 하므로, 문제는 남편을 ‘아웃’시킨 뒤에 가능해질 새로운 욕망,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생산성이다. (김영민/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