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시위대가 정당방위를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녹색세상 2008. 8. 21. 22:48
 

몇 일 전 서울 명동성당 앞 소규모 짱돌 사건 덕분에 폭력ㆍ비폭력 프레임 안에서 촛불 내부의 논쟁이 재개되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정당방위의 개념을 확실히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잠시 8.15광복절 집회 당시를 떠올려보자. 8.15평화행동단의 ‘천 명 이상 연행되기’ 목표인원 미달성으로 인한 절반의 실패는 다음 세 가지 원인에서 출발한다.


첫째, 개인주의가 만연한 까닭에 시위대 안에서 동지애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점.

둘째,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의 엄숙함과 비장함을 찾아 볼 수 없는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촛불 시위라는 점.

셋째,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고, 경찰의 탄압 수위와 그에 따른 시민의 분노 수위가 아직 적정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점.

 

▲경찰이 넘어진 시민을 짓밟고 지나가 코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아야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응급후송 되었다. (사진:오마이뉴스)



요즘 세대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위방법을 알려준다고 하자. “촛불은 무조건 정당하므로 경찰에 맞거나 연행되더라도 참고 또 참아야 우리가 이기는 길이다.” 이런 질문에 그들은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그런 미련한 짓을 왜 해요? 맞거나 연행되는 사람이 바보죠. 시위대 동력 손실 아닌가요? 그렇다면 아저씨는 저항 없이 맞거나 연행될 자신 있어요?”라는 답변이 바로 나올 것이다. 신세대들은 이런 간디식 투쟁 방법을 구식이라 여긴다. 집에서도 안 맞고 곱게 자란 세대인데 불법 경찰에게 맞거나 연행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젊은 혈기에 무력하게 당하는 건 분명 억울한 일이다.


어른들도 예외는 아니다.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거나 집에서 생중계로 시청해도 안타까워 눈물이 나고,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던 감정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간이 흐르면 잊혀 진다. 인간의 망각이란 어쩔 수 없는 삶의 이치다. 시위대가 비폭력 프레임에 갇혀 지냈던 6ㆍ7월 경찰은 그런 시위대의 약점을 악용하면서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진압해놓고 여태 면죄부를 받고 있다. 촛불에 관심 없던 시민이 방패에 찍혀 피 흘리는 촛불소녀의 사진을 보고 말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위험한 곳에 가서 당하고 맞으러 가는지 이해할 수 없네.....” 순식간에 우리만 어리석은 희생자로 취급받는다. 그야말로 외로운 투쟁이다.

 

▲ 방패에 찍히고… 한 시민이 경찰버스에 올라가 항의하자 비무장인 시민에게 경찰이 방패를 휘두르고 있다. 경찰장비 사용 규칙 위반이다. (사진:오마이뉴스)



이젠 적극적 저항 방법인 ‘정당방위’로 눈을 돌려보자. 과거에는 투석전과 꽃병이 정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도 대다수 언론은 시위대의 과격함을 문제 삼았지만 많은 국민들이 운동권의 투쟁을 이해하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 힘들이 모여서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불행히도 여전히 다수의 시민들은 정당방위를 ‘폭력’으로 착각하고 우려한다. 지난 6, 7월 우리는 폭력경찰에 잠시 분노했지만, 지금의 경찰은 시위대를 큰 폭력 없이 그냥 연행만 한다. 8월 들어 필요에 의해 정부와 경찰의 상부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정부와 경찰이 친절해지면 촛불은 점점 약해진다. 의식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한 자들은 “명박이와 청수가 갑자기 착해질 때도 있네.... 왠일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피아식별에 어두워지는 것이다. 그들의 치졸한 물 타기에 당하고 만다. 경제성장을 이루면 이 정부는 금방 친절해진다.


그러나 내년 말까지 경제 성장이 없을 것이라는 정부발표가 있었다. 앞으로 경찰의 과잉진압이 1년 넘게 이어질 것을 의미한다. 시위가 과격해지면 기득권과 수구언론에게 훌륭한 공격의 빌미가 된다고 폭력을 제지한다. 그들은 우리의 입장을 외면하고 오직 시위대의 폭력성만 부각한다. 명동성당 투석전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왜 스스로 우리의 약점을 제공하는 바보짓을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은 폭력이란 자체를 혐오한다. 그들을 향해 우리 주장은 정당하다고, 저들은 보이지 않지만 더 심한 폭력을 휘두른다고 말해봐야 안 먹힌다. 오늘날 시민들이 정당방위에 호응을 안 하는 이유는 시위문화 내부에서 찾아야지 자꾸 외부에서 찾으면 안 된다. 87년 이전에도 정작 시위대와 맞선 것은 전경이었지만 그때는 과격시위가 용납되었기 때문에 전경들의 가족들도 침묵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과격시위는 당장 전의경 부모들로부터도 외면당하지 않는가 말이다. 경찰이 먼저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 또한 핑계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국가 공권력 자체가 거대한 물리력을 가진 집단인데 거기에 폭력으로 맞서겠다는 발상은 이제 버리라는 얘기다. 경찰보다 피해가 크다는 것도 시위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경찰피해가 더 크다고 시위대를 칭찬하는 국민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기의 비폭력 평화 코믹 투쟁의 ‘포스트모더니즘 촛불 시위’는 8월 들어 한계를 드러냈다. 경찰은 더 이상 우리에게 시위장소를 허락지 않았다. 더 이상 웃을 수도 없었다. 전경과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데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음악이 나오면 짜증이 난다.


도로 점거 시 경찰의 진압을 상대로 버티거나 제때 피하지 않으면 곧 연행된다. 연행되지 않으려면 정당방위를 행사하여 내 몸과 권리를 지켜야 한다. 더 이상 연행자의 수는 이슈가 되지 않는다. 투쟁 동력의 손실일 뿐이다. 여태 많이 당해왔다. 경찰이 지금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거의 짓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더 이상 당할 수 없다는 얘기다. 시위대가 정당방위를 할 시기가 왔다는 자연스런 흐름이다. 그 날 명동성당 앞 소규모 투석전의 주역은 10대, 20대였다. 당일 경찰의 대응이 소극적이고 조중동 기사 논조도 약했던 이유는 어린 세대들이 돌을 들었기 때문이다. “10대가 분노에 차서 경찰의 진압을 막기 위해 돌을 던졌다”라는 기사가 실리는 즉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다. 조중동은 그 점을 예측하고 기사에서 연령층만 쏙 빼고 소설을 써댄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먼저 도발했다던 논란은 더 이상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시위대 일부가 실수하면 우리는 이들이 프락치가 아닌 이상 최대한 도와야 한다. 카톨릭 회관 주차장 벽 위에서 실수로 병을 떨어뜨려도 우리는 하늘에서 병이 떨어졌다고 감싸줘야 한다. MB에 맞서 이기려면 시위대도 영악해야 한다.투석전 사건으로 지역 촛불이 어려울 수 있다. 만일 지나가던 시민이 명동성당 투석전 얘기로 따지면 우리는 무조건 경찰 잘못으로 돌리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진압당한 세대들이 어린 10대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촛불에 유리하게끔 눈치껏 여론조장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똑똑한 사람들만 모였다던 정부와 한나라당, 뉴라이트 그리고 검찰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단군 이래로 착하게만 살아온 한민족이라고 그런 감정적 풍습을 미련하게 답습할 필요는 없다. 나쁜 여자가 성공하고 착한 여자는 고생한다는 요즘이다. 어떤 죄는 과정에서는 미움 받아도 결과에 따라 정당성이 부여되기도 한다는 것을 세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짱돌은 유사 이래로 가장 원시적인 정당방위용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돌멩이를 전경의 몸에 맞히는 것도 아니다. 본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돌멩이를 숨겨만 놨다가 경찰의 폭력진압이 예상될 때 꺼내들기만 하면 된다. 무모한 선제공격은 앞으로 절대 없다. 파이와 꽃병은 끝까지 자제해야 한다. 그런데 시위만능주의 혹은 중독증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된다. 시위와 대국민홍보전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야 한다는 말이다. 08년도 전경들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겁이 없다. 최소한의 정당방위만 행사해도 이들은 겁을 먹기 마련이다. 물론, 명령이 떨어지면 막무가내로 진압 하겠지만 백명, 천명단위로 돌을 던지면 이들은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경찰이 적응하고 진화하여 새로운 작전을 쓰면, 시위대도 그에 맞게 진화한다.


사람들은 불이 나면 구경하고자 모여드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투석전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곳에 젊은 세대들이 돌을 던지거나 경찰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이면 지나가던 행인들도 시위대 편을 들 수 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관심을 끌고 홍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위다운 시위를 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던 강성들이 시위현장으로 향하게 된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의 추격에 �긴 1만여 대학생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4일 밤낮으로 경찰의 최루탄에 대항하여 투석전을 펼쳤다. 부당한 경찰에 항거해 싸울수록 시위대는 더욱더 동지애로 뭉쳤다. 근처 여학교에선 손수 도시락을 싸서 보냈고, 시민들은 돈과 음료수를 건넸다. 이런 얘기하면 ‘옛날이라 가능 했겠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지금도 예외는 아니라고 확답을 드린다. 정당방위는 시기적 착오가 아닌 시간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고라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