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시민들이 100여일 넘게 촛불 집회에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짓누르는 뭔가가 계속 괴롭히고 있었고, 왠지 그 현장에서 소외되는 듯한 느낌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은 그런 감정에 대한 글이며 그 감정을 공유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싶다. 진중권을 비롯한 몇몇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은 일반시민(운동권이 아닌 시민)이 이렇게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고 마치 세상이 한 순간에 변혁이라고 일어날듯 고무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 역시 이러한 민중들의 자생성에 의한 투쟁은 너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딱 거기까지다.
▲ 곤봉으로 맞고… 경찰이 버스 위에 올라가서 항의하던 시민의 머리채를 끌어당기며 진압봉으로 머리를 가격하고 있다. 이는 경찰장비 사용 규칙 위반이다. (사진:오마이뉴스)
촛불집회가 이보다 더욱 발전될 가능성을 진보진영 지식인이라는 작자들 스스로가 이분법이라는 잣대로 막아버렸다. 폭력ㆍ비폭력, 운동권ㆍ시민을 넘어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 하게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이 가장 먼저 출발한 곳은 전두환 정권과 조중동이었음에도 그들의 표현과 논리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밧줄을 우리가 당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먼저 비폭력ㆍ폭력부터 짚어 보자. 비폭력이라는 구호는 이미 허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허상을 울부짖는다. 어이없는 일이다. 처음 도로로 가기 전 촛불집회에서 도로점거는 ‘폭력행위’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순간 대중들은 그것이 얼마 전까지 자신들이 말했던 폭력을 자신이 행하고 있는 주체가 된다. 스티로폼을 쌓을 때 옆에서 ‘비폭력’을 연호하며 스티로폼을 막던 대중들은 얼마 뒤 국민토성을 쌓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나른다. 그 순간 비폭력은 이미 허상이 된 것이다.
비폭력이라는 감상주의를 넘어서 직접적인 대중행동으로 스스로 비폭력을 거부하고 완강히 저항하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단지 ‘명박산성’ 앞에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아 올리자는 상징적 행위를 두고도 적잖은 사람들이 ‘비폭력’을 외치며 반대했던 것은 ‘비폭력’이 얼마나 경직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폭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경이든 시위대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평화주의(이 말을 여기에 쓸 수 있다면)로만 여겨졌다. 지금 집회 참가자들이 외치는 ‘비폭력’은 저 보수주의적 담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집회 현장에서조차 운동권이 아닌 순수한 일반 시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끝끝내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이 7월 2일 새벽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서 재협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게 연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몸부림을 계속하는 한,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의 말장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부 참가자들의 돌출적 행동을 비폭력의 이름으로 비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조중동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논리는 현재의 비폭력이 원칙의 문제라기보다 보수주의적 담론과의 기이한 타협(?)의 결과임을 분명히 드러내며, 비폭력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타협의 산물이다. 그 힘이 타협이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음은 보수언론이 한 번도 촛불집회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던 데서 알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비폭력이라는 원칙 자체를 부정할 까닭은 없다. 어쨌거나 아무도 다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단 묻고 싶은 것은 과연 그 비폭력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촛불의 힘은 비폭력에서 나온다’는 식의 말은 집회 초기부터 많이 되풀이되어 왔으나, 비폭력이 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옳은지, 비폭력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성찰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더욱이 이러한 양상은 비폭력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라는 게 더욱 어이없는 일이다. 이러한 경직된 비폭력은 전체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후퇴만을 가져올 뿐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 비폭력을 얘기하는 꼬마친구 몇 몇 분들도 비폭력만 얘기할 뿐 성찰은 없다. 폭력ㆍ비폭력, 운동권ㆍ시민의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하고 저들의 담론을 강화한다면, 운동권은 결코 시민이, 시민은 결코 운동권이 될수 없다. 집회의 순수성을 운운하고 진보적인 인사들조차 그것을 인정하는 마당에 대운하 반대나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등의 구호는 변질된 구호에 불과할 것이며 광우병 쇠고기조차 막지 못할 것이다.
‘폭력 집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화염병을 들으라고 재촉하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폭력ㆍ비폭력, 운동권ㆍ시민의 이분법을 넘어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집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경직된 이분법적인 집회에서 나는 많은 소외감을 느꼈다. 더 이상 어느 깃발 밑에도 있지 않은 개인 참가자로서 그리고 그동안 변혁운동을 해왔던 운동권으로서 나는 과연 운동권ㆍ시민 어느 지점에 서있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촛불집회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 물론 나도 걸고 있다. 하지만 각자 외로이 개인주의로 동떨어진 대중들의 외로움을 목도하며 이러한 이분법 속에 점점 촛불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청계광장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저항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허망하고 폭력적인 ‘비폭력’ 구호만 돌아다니고 있는 시위현장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저녁이다.
다시 새로운 변화로 촛불의 희망을 꺼트리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작은 소망이다. 이러한 감정은 나 뿐 일까? 버스를 방화하려던 30대 아저씨는 결국 프락치가 아니었다. ‘비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시위대가 자진해서 동료를 경찰에 연행시킨 어이없는 사건을 보면서 ‘비폭력’이라는 이름의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폭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든 투쟁의 악덕을 증명했다. 동시에 그 폭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투쟁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폭력의 딱지 아래서 매장되기 일쑤였다. 시민들은 계속해서 비폭력 투쟁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보수주의자들은 폭력시위를 계속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기 위해 비폭력ㆍ폭력 이분법을 들이대는 진보적 지식인들과 진보적 언론을 보라. 우습지 아니한가? (다음아고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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