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선 청계천 광장 주변에서 촛불을 들고 “고시 철회! 협상 무효!”를 외치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초반 여중고생이 이끌던 촛불문화제는 이미 가족단위 참가자 등 어른들로 주류가 바뀌었다. 교복 입은 여중고생들이 발랄함과 재치로 촛불문화제를 채웠다면, 넥타이 매고 어린아이 손잡고 나온 어른들은 이제 구체적인 분노를 표출하며 이명박 정부에 맞서고 있다. 구호도 훨씬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 청와대로 달리는 사람들 25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밤샘농성 강제진압에 항의하던 시민들 중 일부가 경찰저지선을 피해 서울시청에서 청와대를 향해 도로를 달리고 있다.
‘조중동을 폐간시키자!’
‘이명박은 하야하라!’
이는 150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조차 섣불리 외치지 못했던 정치적인 구호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3개월여밖에 안 된 상황에서 아무래도 선택하기 부담스런 구호였다. 하지만 운동권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반시민들은 오히려 ‘3개월이 100년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적힌 현수막을 정면에 내걸고 한 목소리로 ‘이명박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다. 구호만 급진적인 게 아니다. 이들은 25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 일대 도로를 점거했고, 일부는 청와대로 가겠다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또 주한 미국 대사관과 세종로정부종합청사 앞에서도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민주노총이나 한총련 등 이른바 ‘운동권 선수’들도 쉽게 점거하지 못했던 세종로를 뚜렷한 지도부도 없는 이들은 쉽게 차지한 것이다.
사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여중고생들에 의해 촉발됐듯이, 뿔난 시민들의 등장 역시 자발적인 현상이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또 스스로 실시간으로 인터넷 카페 등 동호회에 집회 소식을 올려 사람들을 모으는 이른바 ‘디지털 게릴라’들이다. 즉 이미 인터넷 공간에서 댓글과 블로그 포스트 등으로 최근 정국에 불만을 제기했던 네티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들 ‘뿔난 시민’들의 등장과 움직임은 경찰은 물론이고 촛불문화제를 이끌고 있는 국민대책회의 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대책회의 지도부도 이들의 등장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나타내고 있다.
▲ 25일 오후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밤샘시위를 강제 진압한 것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청와대로 행진을 벌이는 가운데 아이를 업고 유모차에 태운 한 여성이 세종로 거리에서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여중고생에 이어 나타난 디지털 게릴라들
한용진 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은 “우리도 깜짝 놀랐다,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알았다”며 “시민들의 요구를 어떤 방향으로 모아서 이끌어 갈 지 고민이 된다”고 토로했다. 국민대책회의 지도력의 한계는 24일 밤부터 25일 아침까지 열린 시민들의 밤샘 시위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이날 국민대책회의 지도부는 시민들의 안정적인 해산을 위해 현장에서 즉석 회의를 여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경찰은 이들 지도부에게 시민들을 해산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지도부는 “우리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 했다. 국민대책회의는 수차례 회의 끝에 한상진 상황실장이 총대를 메고 시민들에게 해산을 제안하기로 했다. 한 실장은 “오늘 하루만 싸울 일도 아니고, 내일 투쟁이 있으니 이제 그만 해산하자”고 시민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크게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가라, 마이크 끄고 내려가라”며 한 실장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처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거리 시위는 국민대책회의의 영향력을 벗어나 있다. 즉 전국 150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몸집 큰 국민대책회의라는 ‘운동권’이 네티즌들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됐다. 백성균 미친소닷넷 운영자는 “오래 전부터 네티즌들은 촛불문화제를 넘어선 다양하고 더 강력한 활동을 요구했는데, 국민대책회의는 그런 요구를 받아 안지 못했다”며 “국민대책회의는 좀 더 네티즌들의 의견을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백 운영자는 “운동권들은 계급장 떼고 어깨에 힘을 풀고 인터넷으로 들어와 함께 네티즌들과 놀아봐야 그들의 분위기와 의견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어쨌든 새로운 ‘디지털 게릴라’들의 등장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시민들 자발적 참여, 가장 무서운 상황이 도래했다’
25일 새벽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만난 진중권 중앙대 교수는 “통제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정치화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며 “이는 결국 그동안 국민들의 부탁을 거부한 이명박 정부가 만든 것으로 5년 내내 충돌은 계속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도 “7년 당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한 것이 결국 6월 항쟁으로 이어진 것처럼 다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며 “가장 무서운 상황이 도래한 것인데, 이 상태에서 정부가 장관 고시를 강행하면 적어도 10만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98년 비정규직 반대 투쟁을 이끌었던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시민들과 이명박 정부가 부딪칠 줄은 알았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며 “단지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다양한 분노가 표출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전 위원장은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소속과 직책 소개하길 좋아했던 기존 운동권들 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을 있는 그대로 살려주고 시민들 대신 감옥 갈 결의를 해야 한다”며 “그런 결의가 있는 사람들이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제안했다.
기존 운동권과는 다른 전혀 통제되지 않는 시민들의 등장에 정부는 현재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미 지난 주말에는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국정원이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다. 정부는 ‘법에 따른 엄정 대처’만 이야기하고 있어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머물러 있음을 그대로 보여줬다. 하지만 진중권 교수는 “시민들의 분노는 이미 임계점을 넘어 섰다”고 밝혔다. 대안 없는 정부의 대처는 더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란 경고다. 실제 시민들은 경찰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26일 새벽까지 게릴라 시위를 벌였다. 25일 밤샘 시위에 참석한 한 시민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열 번 넘게 촛불집회를 했다. 중고교생부터 수십만 명이 재협상 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여전히 대통령은 괴담 운운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국민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나. 결국 우린 더 크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더 큰 싸움 말고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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