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광우병 쇠고기 투쟁, 여기까지인가 여기부터인가?

녹색세상 2008. 5. 23. 21:42

 

 

 

‘재협상’에서 ‘탄핵 대 독재’ 구도로 국면 전환 필요


한번 달아오른 운동은 늘 분화의 계기를 품는다. 이번 ‘미국산 쇠고기’ 사태처럼 여러 세대, 다양한 계층과 배경의 시민들이 참여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운동이 절정을 지났다는 인식이 발생하면, 그런 이미지는 빠르게 확산되어 실제로 운동이 사그라 들게 만든다. 운동이 고양되는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도 공동의 화음을 이루지만, 공동의 상징이 깨지거나 공동의 목표를 상실한 다음에는 같은 현실이라도 체감하는 방식이 갈라진다. 4월 17일, 쇠고기 협상 타결 이후 약 한 달 만에 촛불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숱한 이슈와 아이디어들에 힘입어 운동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성장했다. 아마도 이와 닮은 사건이라면 2003년 미선이ㆍ효순이 추도집회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겠지만, 더러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87년 민주화항쟁이나 4.19마저 연상케 만든다. 이처럼 한창 가열된 운동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분화를 예감한다면, 저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예감을 미리 꺼내고 대비해야 할 만큼 이번 사태는 중요하다. 고양된 현재의 분위기 속에서 연대의 기초를 보다 단단히 다져놓지 못한다면, 지금의 에너지가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될 때 찾아올 허탈감은 더욱 뼈저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찾아올지 모를 분화의 계기를 먼저 상상해야 한다.


5월 17일 촛불문화제에는 근래에 유례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경찰 집계로는 1만 6천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의 추산으로는 3만 5천 명에 달한다. 상공에서 찍힌 사건을 보건대 경찰 측은 현저히 적게 잡았다. 그 정확한 수치를 밝히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잇따른 집회와 문화제를 두고 경찰이나 몇몇 보수언론은 참가자 숫자를 줄여서 보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번 운동이 지니는 한 가지 특징으로서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사실로 5월 17일, 전북지방경찰청은 기자들에게 광주에서 일어난 집회를 ‘촛불 집회’가 아닌 ‘일반 집회’로 보도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촛불의 특징은 번져나가는 데에 있다. 촛불은 마치 생물체를 대하듯 보듬어줘야 타오르며, 꺼지지 않도록 정성을 들여야 한다. 촛불들은 한 데 모여 점차 커져간다. 많은 네티즌들은 촛불문화제 참가인원의 숫자를 줄여 보도하고 있다며 몇몇 언론을 향해 성토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직감하고 있다. 촛불을 둘러싸고 ‘상징’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촛불을 그저 소수의 숫자로 환원하려 한다. 그들에게 이번 촛불 집회는 ‘일반 집회’여야 한다. 알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촛불을 박제화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알 수 없는 대상이 두렵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들


배후세력설도 여기서 나온다. 그냥 음모론이 아니다. 그들에게 적은 자기 손으로 쥘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에게 촛불은 세포가 분열하듯이 성장하는 것이다. 생물체다. 생물체라면 꺼지지 않도록, 촛불에 생명을 부여한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그러면 촛불은 점차 성장한다. 지금 정부 측은 어떻게 해서든 타오르는 촛불을 2만 이하의 수치로 내리누르려는 것 같다. 그 이상이면 ‘배후세력설’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양. 하지만 촛불은 더욱 번져가고 있다. 5만인지 10만인지 알 수 없지만, 촛불은 다음의 상징적인 수치를 향해 성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상징적인 수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다. 이제 20% 초반까지 왔지만, 10%대로 진입하면(이명박 대통령의 무능으로 떨어진 것이라기보다 대중의 힘으로 끌어내렸다는 의미에서 ‘진입’이라고 표현하겠다) 그것 또한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


적어도 촛불집회의 참가자 수나 대통령 지지율은 현재의 동향을 가늠하는 지표로 유용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에 국면을 바꾸는 상징의 역할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수치가 갖는 상징 효과는 지속적이지 않다. 인터넷에서 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은 100만까지 폭발적으로 올라가면서 하루하루 민심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기능하다가 이제 주춤하고 있다. 10만에서 100만으로 쭉쭉 뻗어가기보다 100만에서 300만으로 접어들기는 훨씬 힘겹지만, 상징으로서의 효과는 덜하다. 혹여나 숫자가 더디게 늘어날 경우, 그것은 역으로 운동의 쇠퇴를 알리는 징후처럼 간주될 위험마저 있다. 그래서 촛불 말고도, 인터넷 서명 말고도 다른 힘의 지지대가 필요하다.


정부는 지금 총동원령을 내린 모양새다. 이명박 대통령이 5.18 기념행사에 얼굴을 내밀기 위해 물대포로 무장한 8,000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초중고등 학생들의 집회 참가를 막기 위해 교사들을 동원했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내리기 위해 지방기관을 동원했으며, 내부의 동요를 막고자 공무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 이번 사태의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촛불이 더욱 힘 있게 타오르는 이유는 바로 생활의 곳곳에 거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번 운동의 특징을 좀 더 분명히 반추해보고 싶다. 이러한 특징들이 앞으로 운동의 진전에서도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번 운동에서는 10대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촛불문화제의 주역이었다. ‘안단테’라는 아이디의 고등학생이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운동을 이끌어냈다. 그들의 참여는 기성세대를 각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운동에 참가하는 심리적인 문턱을 낮춰 놓았다. 이번 촛불문화제는 집회에 참가하기로 결의한 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참여자와 비참여자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며, 촛불문화제는 유동인구로, 흐름으로 존재했다. 더불어 깃발이 줄어든 대신에 자신의 발상을 담은 표현물이 등장했다. 단상 위에 올라간 유명 인사를 바라보는 집회가 아니라 서로를 구경하는 표현의 장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10대들이 참가한 효과다.

 

 

서로가 힘이 된 다양한 투쟁 주체들


그리고 이번 운동에서는 누리꾼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미국산 소고기 파문이 촛불시위로 전환된 데에는 근거 있는 정보를 쥘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지가 초반의 관건이었다. 이 점에서 네티즌들은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 매우 전문적인 정보들을 추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생활의 언어로 옮겨냈다. 또한 인터넷은 운동을 어떻게 조직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갈지를 논의하는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는 여러 인터넷 카페들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 한편 인터넷은 연대감을 기르고 분위기를 고양하는 매체로도 활용되었다. 가령 탄핵 서명운동을 주도한 ‘안단테’가 경찰에게 수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번지자 많은 네티즌들은 자신의 아이디를 ‘안단테’ ‘나도 안단테’ 등으로 바꿨으며, 정부가 PD수첩을 제소하기로 결정하자 변호사비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작은 영웅들이 등장하면서 전문적인 소고기 공방에 일상의 색이 입혀졌다. 100분토론 도중에 이선영 ‘주부’는 소고기 수입 개방론자들에게는 논리적 근거의 ‘성역’인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 조목조목 미국산 소고기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그들을 무색케 만들었다. 윤도현, 김장훈, 김민선 씨 등의 연예인들은 미국산 소고기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거나 직접 집회에 참가했다. 연예인들의 참여를 두고 정치적인 색채가 희석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이들의 참여는 분명 집회를 대중화시킨 면이 있다. 또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몇몇 용기 있는 기자들의 양심 고백이 이어졌다. 한편 강달프(강기갑 의원)처럼 정치인이 인기를 얻는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무엇보다 이번 운동 기간 동안에는 ‘아고라’ 등에서 학생, 주부, 농민 등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스타로 떠올라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꺼리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등장으로 자칫 전문적인 논의로 전이될 수 있는 소고기 공방에 사람냄새가 더해져 대중은 그다지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거나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유행어, 노래, 이미지 등을 네티즌들이 만들어 일상에 보급했으며, 과천시에서 시작한 현수막 달기 운동과 미주 한인주부들이 시작한 리본 달기 운동 등이 번져나가면서 운동이 일상에 뿌리를 내린 것도 이번 사태의 한 가지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세대 간, 직종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전문영역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 옮겨지고 민주주의 등의 형해화 된 말에 실감이 주입되어 운동의 영역과 일상생활 영역 사이의 단층이 옅어졌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시도와 사건들은 현실정치의 동향과는 다른 위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기억하는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좀처럼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고시를 연기했지만 지연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국민들이 분노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 마냥 보이며, 여당이 과반수를 점하는 국회가 도래할 때까지 미뤄둔다는 현실적인 포석도 깔려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도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당국자들이 흘리는 발언을 보면 그들은 현재 여론의 수세에 처한 것을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인상을 풍긴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미국화 되어야 선진화된다는 그들의 믿음은 좀처럼 꺾이지 않을 기세다. 쇠고기 협상이나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면, 그들은 개인의 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한 만큼이나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현실은 죄로 얼룩져 있을지나 모든 구원은 미국으로부터 찾아올지니.” 일말의 자기반성도 담겨있지 않은 한국개조론자들의 믿음. 그 믿음이 가장 두렵다. 하지만 진정한 시련은 그들이 아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첫째, 이번 운동이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재협상 요구’는 상황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목표로서의 기능을 잃고 만다. 5월 19일, 정부는 검역주권을 ‘명문화’하였다며 생색내고 있다. 내일은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예정되어 있다.(이 글은 21일 작성됐다-편집자) 하지만 저렇듯 사태 해결에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정치적인 제스처에도 운동의 성장은 주춤할 수 있다. 더구나 곧 찾아올 여당 과반수 국회에서 재협상은 이루어지더라도 요식행위가 되고 말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요식행위가 운동의 분화를 초래할지 모른다.


촛불을 다른 사안으로 옮겨 붙여야


둘째, 그 경우 다시 힘을 결집할 수 있는 서사구도가 마련되지 않았다. ‘진보 대 보수’라는 구도는 실감에서 멀어져 있으며, 오히려 운동을 분열시킬 소지를 갖고 있다. 지금 인터넷을 보면 대중들의 마음에 어린 응어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자질과 비교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상황을 움켜쥐는 서사의 구도,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낼 수 있는 서사의 구도가 부재함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셋째, 운동의 동력이 될 만한 계기가 부족하다. 미국산 소고기와 관련된 정보는 미디어의 보도와 청문회를 거치며 나올 만큼 나왔다. 이제 그만한 정보가 생산되기도 힘들며 무엇보다 나오더라도 전만한 파괴력을 지닐 리 없다. 현재는 정부의 행태가 대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격이지만, 그조차 체념을 머금은 경멸로 바뀐다면 운동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촛불은 다른 사안들로 옮겨 붙는 일이 시급하다. 소고기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라도 촛불은 번져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안들도 함께 부각되어야 한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 이외에도 대운하 건설, 의료보험 민영화, 영어 몰입교육, 대북 문제 등 얼마나 많은 사안들이 산적해 있는가. 하지만 바로 이곳이 이번 운동의 가장 큰 시련이자, 지금이 임계점인지 한계점인지를 가르는 관건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2003년과 2004년에는 촛불이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잠시 들추자면, 새만금은 흙으로 메워졌으며, 대추리의 주민들은 쫓겨났고, 한미 FTA는 체결되었다. 모두 지난 탄핵반대 시위와 탄핵의 촛불을 들려고 하는 오늘 사이에 있던 일들이다.


촛불의 아픈 기억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정치가가 허황된 새만금 개발에 열을 올릴 때 그를 밀어준 사람들, 대추리에서 주민들이 싸우고 있을 때 토지보상을 더 받으려고 저런다며 주민들을 비난한 사람들, 한미 FTA 문제가 달아올랐을 때 정부가 제공한 설익은 선전들에 매달려 스크린쿼터 사수운동을 하는 영화인들을 집단이기주의라고 매도한 사람들을. 그리고 이명박 씨는 대운하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도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던가. 이번 미국산 소고기 파동에서 사람들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레토릭은 ‘가족’이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나 자신 그리고 우리 가족의 건강권과 직결되어 있다. 이번 운동이 이만한 반향을 얻는 데서 ‘가족’이란 레토릭은 몹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왜 새만금 등의 다른 사안들은 ‘소고기 파동’만한 반향을 얻지 못했는지, 그 이유의 얼마간을 역으로 설명해준다. 물론 ‘가족’이라는 레토릭을 두고 비아냥거릴 생각은 전혀 없다. ‘나’와 ‘가족’에 대한 애정은 다른 누군가, 다른 누군가에게 ‘가족’일 사람에 대한 염려로 이어져 이만한 힘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레토릭과 쉽사리 결합되지 않는 다른 사안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 목소리로 반대할 수 있을까. 대운하 정책,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서 지금의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10대들을 절망으로 몰아가는 우열반을 없애자며 기성세대들이 지금처럼 거리로 나올 수 있을까. 청소년들이 비정규직 확산의 반대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떠한 요구도 소고기 수입 반대 아래서 공동의 선율을 이루고 있지만, ‘소고기 수입 반대’라는 공동의 문제, 아니 공동의 언어가 사라진 다음에도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공동의 동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근원적인 시련은 정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수성에서 찾아올지 모른다.


탄핵 요구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탄핵 요구를 기다린다. 국면이 ‘소고기 재협상’에서 ‘독재냐 탄핵이냐’로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소고기 재협상도 실질적으로 힘을 받으리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소고기 재협상 말고도 공동의 언어를 마련해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고기 재협상 요구와 탄핵 요구가 정확하게 맞물리지는 않는다. 적어도 ‘소고기 재협상’의 주체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탄핵 요구는 그 자체로 얼마간 운동을 분화시킬 불씨를 지니고 있다. ‘소고기 재협상’보다 높은 수위를 요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고기 재협상’과 ‘탄핵’은 같이 외쳐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에게는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공동의 서사구도가 필요하고 그 가운데 하나는 ‘독재냐 탄핵이냐’이기 때문이다. ‘독재’라는 말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현 상황이 낡았을 뿐이다. 둘째, 우리는 소고기 말고도 너무나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지는 만큼 세부사항에 힘을 발휘할 동력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결점을 찾아야 한다. 결국 이유는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인 것이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인 조건 속에서 탄핵 요구가 실현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탄핵은 결과가 아니라 방법이자 효과로라도 요구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여당 과반수 국회가 도래하면 독재의 조건은 구비되는 셈이며, 우리의 분노는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며, 운동의 분화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핵 요구는 시간을 아껴 쓰는 방법이다. 또한 여러 사안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힘을 비축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실패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실패를 공동의 체험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실패가 공동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다면, 실패를 하더라도 허탈감과 함께 운동의 에너지가 개개인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한 분노와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윤여일 / 연구공간 ‘수유+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