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진보의 탈을 쓴 가부장

녹색세상 2008. 5. 23. 23:09

청년시절인 90년대 초반 여성학자인 권인숙 씨가 ‘진보적 남성지식인들의 비진보적 여성관’이란 제목의 글이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의 글로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 갔다 온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상하기만한 어머니가 ‘아내에게는 폭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남성들은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별 차이가 없는 마찬가지의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인 ‘진보를 외치는 가부장’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30대 후반 이상의 ‘운동권 여성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친정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들이 많다.

 

  ▲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의 행복은 우리 모두의 행복’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철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진보적인 남성들과 결혼하면 ‘가부장적인 제약으로 인한 억압적인 삶’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이 같이 운동을 했던 동지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가부장 사회의 성별분업 역할인 ‘생계부양자 남성ㆍ가사전담 여성’의 틀에 자신들이 구속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 공적으로 표명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일상생활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알면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여성들은 ‘내면과 바깥’의 불일치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을 통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생활에서 실천하는 자세 사이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는 정도는 인정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간극을 인식하고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다.


남편들과의 문제가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너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대립하고 충돌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극복해야 할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여성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인격의 차원’이나 남성 일반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성의 차원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 ‘공약의 부담’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의아해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여성들은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독재 권력과 자본을 향한 투쟁에서는 그처럼 치열했던 사랑하는 남자의 민주주의는 아내나 가족 안에서는 거의 작동을 하지 않아 실망을 금치 못한다.


권인숙 박사의 지적처럼 시어머니 역시 ‘민주화를 위해 감옥행도 마다하지 않은 똑똑한 내 아들과 사는 것을 고마워하라’며 며느리를 억압한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가족은 ‘사랑과 친밀함’을 본질로 하는 사적이고 특수한 영역으로 본다. 그러기에 민주주의나 인권ㆍ정의 같은 공적인 영역의 가치를 가족 관계에 적용하는 것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이익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로 남아 있는 포근한 ‘공동사회’를 침해하는 과격한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상식(물의 법칙)은 상식보다 더 끈끈한 특수논리(피의 법칙)로 대체한다. 그래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며 이 포근한 공간을 권력이라든가 ‘성정치학’ 같은 살벌한(?) 개념으로 분석하는 여성주의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친다. 보통 남성들이 말대꾸 하는 아내에게 ‘여자가 어딜’이라고 한다면 진보적인 남성들은 ‘운동하는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면과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여성활동가들에게 ‘까칠하고 깐깐하다’고 하거나 ‘근본적인 문제를 눈앞에 두고 적전분열을 한다’며 오히려 비난한다.


진보 활동을 하는 남성들의 ‘사상과 일상의 불일치’ 문제를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 제기하는 게 균형을 잃은 처사로 볼 수도 있다. 주장과 행동의 불일치는 진보적인 남성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며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와 일상의 공간에서 수시로 일어난다. 운동권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약의 부담’을 스스로 졌기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남성들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고 공적인 영역을 거의 독점해온 남성들의 특성이 운동권 남성들에게도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치부되어 온 가족이 역설적으로 ‘공적으로 주장하는 가치’와 ‘일상의 실제행동’ 사이의 불일치가 가장 자연스레 드러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남성들의 이중성을 극복해야할 영원한 숙제로 마냥 미루지만 말고 함께 노력할 때 행복은 우리 앞에 점점 가까워 올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에서 발췌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