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기독교와 관련된 부문만 몇 자 적었습니다. 혹 저와는 견해가 다른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흔히 신학이라고 하면 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의 전유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앙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 신학이니 결코 어려운 게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평소의 고민을 정리해 저 멀리 하늘나라에 떨어져 있기만 한 성서의 얘기가 보다 친숙하게 우리에게 와 닿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적은 것입니다. 전문가도 아니고 밑천이 짧다보니 좋은 글이 되지 못한 것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서 내용의 비논리적인 요소에 대한 이해
성서를 읽어보면 구약에 나오는 ‘사랑의 노래’(아가서)와 같은 연인간의 절묘한 사랑을 표현한 책 말고는 재미있는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예수 이전의 사건이 기록된 구약성서(old testment bible)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대기가 대부분인데 사막이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건을 기록한 내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만 하는 유목민의 정서가 곳곳에 나타납니다.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대 반란을 일으켜 억압이 없는 자신들의 낙원들 찾아간다는 게 주 내용인 이집트 탈출기를 보면 사막의 절박한 생활의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입성기(여호수아)를 보면 진입을 앞두고 토착민들과 크게 맞짱을 떠야 하기에 싸움이 가능한 인구조사를 하는데 어린이와 여자, 노인을 빼고 60만이 넘는다는 정말 황당무계한 숫자가 나오는데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게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6천명 내외로 추정한다.) 당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인구가 몇 십만이 안 되는데 남녀노소를 다 합친다면 250∼3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지도부가 있다 할지라도 이 정도의 유랑 인구를 이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그냥 전설로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고 믿음이 좋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사건이라고 표현하지만 비과학적인 일이라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신 야훼(회교도는 알라라고 하듯 신의 고유명사)의 천지창조 사건도 사실이 아닌 우리의 단군 신화와 비슷한 구전설화입니다. 신학자들은 창조설화에 바벨론(지금의 이란)에 잡혀 가 있던 유대인들의 집단 신앙 고백이 그 배경에 깔려 있음이 핵심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이해한다면 더 가슴에 와 닿을 텐데 대부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의 검증을 거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머리로 하느님의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말라는 점잖은 훈수를 둡니다. 야훼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가 주신 고귀한 선물인 머리로 이해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신학교 가면 성서 개론 시간에 이런 내용을 배우는데 대부분의 믿음 좋은 초보 학생들이 신학을 전공하고 오랜 기간 연구한 교수 말보다는 어릴 때 교회에서 비전공자들로부터 단편적으로 몇 마디들은 것은 더 신봉해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성적이지 않은 세뇌 교육의 무서움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죠.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는 인간 존중의 철학이 천지창조 설화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건만 이런 핵심은 빼고 '그냥 믿어라'는 말만 해대는 게 현실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신학 수업을 받을 때 배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다 반납하고 ‘오직 믿음’ 만을 강조하는 그들에게 왜 바른말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교인들의 수준이 낮아서 이해하기 어렵다”며 바른 말 하지 않은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회피하기만 합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믿음 없는 사상이 수상한’ 목사로 찍혀 신령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 의해 바로 쫓겨나는 게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업자득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지창조 설화와 신약성서의 주된 내용
창조설화의 1장과 2장의 천지창조 순서가 틀리다는 사실을 아는 교인은 별로 없습니다. 청년 시절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모세 한 사람이 기록한 신령한 내용으로 가득 찬 것으로 배웠는데 다른 것도 아닌 제일 앞부분이 틀리다니...... 기록된 연대와 배경이 다르니 기록한 사람이 다른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믿으라고만 세뇌를 받아왔고 잘 안 믿어지는 자신은 믿음이 없는 신자로 여기는 게 죄인의 올바른 태도로 강요 받아온 게 현실입니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신도들의 감성적인 정서와 결합해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려는 게으른 성직자들의 직무유기임에 분명하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확인하려는 건강한 이성의 비판이 자신들의 신학적인 성장과 발전의 촉매제이건만 불순 세력으로 뒤집어씌우는 악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조용히 대접받고 싶은 것이죠. 이럴 때 잘 나오는 말이 ‘사상이 수상한 교인’이라는 것임은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성서(new testment)중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 세 명의 저자가 각자의 관점에서 적어 놓았습니다. 기록한 사람의 학습의 정도와 경험의 형태가 다름이 곳곳에서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성경은 일 점 일획도 더 하고 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황당무계한 억지를 부리며 무식의 최상급을 자랑하는 먹사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성서는 바울이 먼저 기록한 문서를 바탕으로 예수의 제자들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직접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으며 기록했다고 우기는 정말 가관이죠. 아무튼 이 논리가 맞으려면 먼저 성서의 원본이 발견되고 그 진위를 밝히는 검증의 과정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본적인 절차도 무시하고 그냥 우겨대기만 합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국교로 공인된 후 라틴어로 번역하고, 종교 개혁 이후 마르틴 루터에 의해 독어로 번역한 것을 영어로 번역하고, 다시 중국어로 옮겼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했으니 그 과정에서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음은 분명한데 개신교에서는 21세기인 아직도 그걸 사용하고 있는데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일 점 일획도 더 하고 빼면 안 된다고 우길 수 있습니까? 최근에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서의 사본은 사해 사본인데 다른 사본과 비교하면 같은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틀리는 부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구전되어 오던 것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실수나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되돌아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니 학문하는 자들의 태도라 할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 기독교를 전한 선수들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엉터리 학력 비인가 지방 신학교 출신이니 수준이 낮을 밖에 없습니다. 학력인가도 못 받은 동네에서 제대로 된 신학적 관점이 있을 수 없으니 오로지 믿으라고 거품 물뿐이죠. 아직도 당시의 것을 정통보수라 우려먹으며 밥벌이하는 상당수 한국교회 목회자의 수준이 어떠할 것인가는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대체로) 한국 사회의 보수라 자칭하는 것들 치고 어떤 분야든 공부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습니다. (카톨릭의 경우 신학 수업 과정은 철저한데 모든 힘이 사제에게 실리는 구조적인 한계로 인해 변질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연구하지 않은 교수는 강의 내용이 부실하고 질문에 약한 것이 분명 하듯 공부 안 하는 성직자는 자신의 게으름과 무식이 탄로 날까봐 질문하거나 문제 제기를 하는 교인을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이해와 끊임없는 질문
신약성서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예수 부활 사건의 경우 (죽어서) 무덤에 묻힌 예수가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게 정설처럼 자리 잡고 있으나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기독교의 비신화화를 주장하면서 성서 속의 신화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뛰어넘는 실존적인 고백이라는 표현을 해 아무런 신학적 입장도 없이 그냥 믿음만 떠들어대는 한국교회의 꼴통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단죄를 받기도 했습니다. 안 두 희 에게 암살당하신 백범 선생, 역사 속의 인물이지만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는 게 백범의 부활이듯 부활을 그저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만 돌리지 말고 삶 속에서의 고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주 내용이건만 자신의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이상하게 몰아 버립니다. 신비적인 요소가 가득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종교가 우리 가까이 다가와 보다 친숙한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몇 줄글을 쓴 보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곳이라 할 수 있는 노숙인 문제에 대해 온 몸을 던져 그들과 함께 하는 일에 성직자들이 나서고,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 생존을 보장하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면 팔레스틴 촌놈 예수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분명 한가 봅니다.(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예수가 왔기에 그 자리를 찾아갈 뿐이라며 장애아를 돌보며 미국에게 찍소리 못하는 한국 정부를 향해 목소리 높여 외치는 한 문정현 신부님 같은 분의 삶은 앞만 보고 달리며 싸워 이기기에만 급급한 우리들로 하여금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 흐르는 전승을 제사장적 전승과 예언자적 전승이 있습니다. 성직자로서 자신의 하느님께 제사 올리는 일과 이 시대의 예언자로서 선지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 교회는 제사장적 전승에 젖어 자신들의 아성을 쌓을 줄 만 알지 이웃이나 우리 사회의 아픔에 함께 하는 예언자적 전승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자의 일원으로서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에 할 말이 없는 게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해 몸부림치는 기독자들이 있다는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봄에 팔레스틴 촌놈 예수의 부활 사건이 한반도 곳곳에서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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