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평소 “아무리 미혼이라 할지라도 성인의 경우 모든 선택과 결정은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혼 전까지는 부모의 품에서 아무 탈(?) 없이 지내다 보내야 한다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부모들로부터 ‘정신 나간 소리 하네. 네 새끼도 그러는지 보자’는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이죠. 그렇다고 성인인 자식이 부모 염려처럼 아무 일 없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만은 그렇지 않다’는 이중적인 잣대와 기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청소년들의 동거권에 대한 저의 고민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머물러 있습니다. 가수 민해경의 노래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기에 19세 이상은 물론이려니와 청소년들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에 이 논쟁의 물꼬를 트고자 하니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밑천이 짧은 탓에 ‘88만원 세대’에 나온 내용을 저자의 동의도 없이 발췌 수정했으나 생산적인 방향의 논쟁을 하려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거 쓸려고 책 사서 4번이나 읽었습니다. ^^)
▲ 경북 청도 비슬산에서 동문산악회 시산제를 지내고 음복하고 있는 사람이 장본인입니다. ^^
고등학생 자식의 ‘동거권’ 주장에 대해
여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나 그 사람하고 동거하기로 했어’라고 선언했다고 가정할 경우 조용했던 집안의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집 역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기에 제기하려고 한다. 집안 망신에서 ‘미친 년’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 최악의 온갖 쌍소리가 난무할 것이고, “딸 교육을 어떻게 시켜서 저 꼴이냐”는 아버지의 말 등으로 인해 가족들의 갈등의 골은 엄청나게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의 청소년들이 또래의 누군가를 사랑하고 성관계를 갖고 싶어 하고, 나아가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은 오랜 인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고등학생 연배의 동거 선언은 유럽사회에서도 이르다 싶은 사건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는 딸ㆍ아들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식구들 사이의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 어린애 같기만 한 자식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미래에 대핸 고민하는 상황에서 저주를 퍼부을 부모는 OECD 가입 국가 중 대한민국 말고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문제를 갖고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일 부모가 가족들끼리 서로 의논해 심사숙고 끝에 허락했다 할지라도 ‘자식을 내팽개친 부모’라는 지탄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대는 커녕 법적으로 성인이라 자신의 명의로 모든 거래를 하고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만 19세 이상의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당장 나가, 호적에서 파 버려라’는 말이 나오는 게 현실이다. 대학생들의 동거를 ‘정조관념이 희박한 성문란 사건’으로 보도하는 언론을 보면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알 수 있다. 부모로서의 본성과 자식의 삶에 대한 사랑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 사회’와 ‘우리 사회’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분명히 있다. 매우 슬픈 무엇인가 있는데 문화적인 차이만이 아닌 경제 구조가 다르다. 현대 경제학에서도 나이와 섹스, 즉 성관계에 대한 주제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느 경제학자는 ‘인적자본론’이라는 가설을 통해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왜 더 많은 교육을 시키려고 하는지 설명함으로서 교육경제학이라는 틀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첫 번째 성관계에 대해
‘첫 번째 성관계’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 보자. 몇 살에 어떻게 누구와 어떤 식으로 첫 관계를 하는 것이 가장 ‘최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랑을 수학이나 기타 공식으로 정의하기 어렵고 사랑에 의미를 두지 않고 동물 짝 짓기처럼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보다 나은 배우자를 만나고 싶다고 전제하고 이론을 구성하면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절대치에 대한 균형점이 나온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우리 조상들은 언제 첫 관계를 했을까 살펴보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너무나 은밀한 영역이기도 해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과 우리나라의 ‘춘향전’이 10대들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고전인데, 둘 다 불같은 사랑과 열정에 관한 이야기고 읽으라고 권장하는 ‘양서목록’에 올라와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에 빠졌던 것은 16세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첫 눈에 반해 어른들이 기겁할 정도의 ‘다양한 체위’로 성관계를 한 것도 그 때다. 문헌을 보면 ‘이팔청춘’이라 부르는 이 나이면 대부분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남자들의 경우 생물학적으로 16~18세인 고등학생 연배가 성적인 욕구가 가장 높은데 이 연령대의 성에 대한 충동은 살인의 충동만큼 높다고 많은 의사들은 말한다. 잦은 성관계로 ‘과다방사’할 경우 몸의 기(氣)가 빠져 성장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노년에 고생한다고 보는 한의사들은 일찍 성관계 갖는 것을 반대하기도 한다.
여성들의 경우 성숙도가 남성보다 빨라 왕비들이 결혼하는 나이가 13~14세 인데 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이지만 예전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 나이에 벌써 성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세자빈이 되어 국모가 될 훈련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16세 이상은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른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와 집안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6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성관계를 제도적으로 금지하고는 것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이런 상황을 ‘예산제약’이라고 표준경제학에서 말하는데 ‘돈이 없기 때문’에 성관계나 결혼도 미루어야 한다는 게 주된 이유다.
우리나라 이팔청춘의 첫 관계는 금지하거나 이루어진다고 해도 대개 슬프게 막을 내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관계할 권리를 누릴 수 없을뿐더러, 결혼이나 동거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는 성관계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여성들의 경우 평균 30세에 첫 출산을 하는데 평균적인 소녀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미루고 있다. 이 세대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진행되고 있어 ‘전 세대에 비해 10대들이 더 가난해 졌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가정을 꾸리거나 경제적으로 독립해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의 그 세대는 세대주로서 독립하거나 삶을 꾸려간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부모와 같이 살았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경제적인 독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선발자본주의 국가는 어떤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소한 권리 하나도 그냥 생긴 것은 거의 없다. 기나긴 갈등 속에서 투쟁과 타협을 통해 얻은 것이다. 별 것 아니라고 볼지 모르지만 한국의 10대들은 ‘두발의 자유’ 조차 없는 상태에서 ‘동거권’과 같은 고급스런 권리(?)는 더욱 요원하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유럽의 경우라 할지라도 16세의 동거는 조금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자식이 시작하는 동거를 그들의 부모라고 무조건 축하해 주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럴 경우 ‘2~3년 기다려 보자’며 서로 대화가 오간다. 16세 이후의 청소년들이 동거권의 형태로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리는 권리는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확보되어 있다.
보통 청소년들은 열예닐곱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푹 빠지고, 가정을 꾸리는 것과 같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다. 대개의 경우 스무 살이 되면 부모와 독립해 별도의 삶을 시작하며, 이 나이 무렵에 첫 동거를 시작하면서 민주시민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 딛는다. 성인이 된 자식에게 ‘통행금지’ 시간까지 정해 놓고 늦으면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독립을 일찍 시작한 그들과 결혼 전까지 행여 탈이라도 날까봐 금지옥엽이야 부모가 돌보는 우리와 단순히 ‘문화적인 차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이 향후 경쟁에서 누가 이길 수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린 왜 독립하지 못하는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사교육에 묶여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 순간에 선진국의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풀어갈 준비를 시작한다. 한국과는 적게는 6년에서 많게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이 10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독립을 하려면 우선 살 집이 있어야 하는데 국민의 절반이 집이 없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10대나 20대 초반의 동거ㆍ주거권 같은 이야기를 사회적인 의제로 꺼냈다가는 ‘딸자식 망치는 미친 부모’로 몰려 몰래 맞기 십상이다. 외국에서는 주거권 보장을 위해 혼자 살거나 동거할 경우 50~60% 가량의 월세보조금을 지급한다. 지방자치 단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동거의 경우 조금 더 지원해 독립을 사회가 책임진다고 볼 수 있다. 그 사회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주거권과 생활지원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동거권을 폭 넓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 이전의 동거 생활이 유럽만큼 자유롭지 않다. 물론 미국도 스무 살이 되면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해 살기는 하지만 유럽보다는 빡빡한데 사회보장이 허술하고 기본 장치가 거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는 ‘알아서 해라’에 가까운데 대신 아르바이트와 같은 청소년 노동에 대해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임금을 지불한다. 한국의 경우 성인이 되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옥이 눈앞에 펼쳐진다. 절대로 독립을 인정하지도 않고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인 질서와 장치를 만들려고도 하지 않는, ‘한국형 청소년 체계’는 부자 부모를 둔 소수의 청소년을 제외한 나머지는 독립해 시민으로 살아가기 매우 어렵다.
중등교육이라고 하는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난 10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과 같은 독립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뿐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보호와 선도’라는 이름 아래 성인이 되지 못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10대 후반에 독립하고 동거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인이 된 선진국의 10대와 사회의 종속 상태에서 어둡게 20대 초반을 맞이하는 우리나라의 10대들의 경쟁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10대 초기 단계에서 미숙아 상태로 20대를 맞는 우리나라 청소년들과 선진국 청소년들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 시절의 경험이 일생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20대에 독립을 하거나 더 일찍 동거를 시작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회는 경제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꽉 막혀 있고, 사회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장치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래 놓고도 자본과 권력이 입에 거품 물고 떠드는 ‘국제경쟁력’이 생길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88만원 세대’에서 발췌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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