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형,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초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군요. 갈수록 이런 변덕스런 날씨가 많아 진다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기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여간 걱정이 아니랍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초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편리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조금 걸어도 될 거리를 차가 있어야만 하는 생활 습관이 어느 듯 몸에 배어 차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죠. 이집트 탈출기 사경회 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 사랑의교회 앞마당에서 이랜드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기독학생들이 4월 20일 기도회를 했다. 고난 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사진:뉴스앤조이 정효임)
같이 ‘예수를 그리스로 고백’ 하지만 서로의 신학적 관점이 다르니 억지로 앉아 있는 게 오히려 남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 조용히 나왔습니다. 이점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알겠습니다. 같이 ‘예수를 그리스로 고백’ 하지만 서로의 신학적 관점이 다르니 억지로 앉아 있는 것 보다 비켜주는 게 예의란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정말 불편한 것은 ‘아멘’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아멘’을 김 형이 강요할 때랍니다.
가슴에 와 닿아야 자연스레 나올 것인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남들은 ‘아멘’이라 해도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머리로 믿지 말고 가슴으로 믿어라’고 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고 자꾸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짜증이 납니다. 수양이 부족한 탓에 ‘그러려니’ 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 놓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구약성서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사건이 수천 년 전의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수 없이 곱씹어 본답니다. 물론 기적사화는 빼고 말이죠. (이 대목이 김 형과 제가 다른 것이죠.) 수천 년 전의 일이 구전 되어 오다 파피루스에 기록을 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도 더려 있는 게 사실이죠. 그러기에 저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말씀처럼 ‘성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아둔한 윤희용이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으니 묵상하며 수 없이 질문을 해 보는 수밖에요.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잘 판단해서 알아서 하라’는 생각이 가슴에 늘 와 닿더군요. 신상 생활 30년 넘게 했지만 믿음이 부족한 탓에 기도하면 바로 응답을 받지 못하지만 저의 판단과 계산과는 다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것을 저는 감히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고백을 해 봅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누구의 강요나 획일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싫어합니다.
그러기에 ‘당신과 나는 다른 점이 있다’는 차이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하죠. 상대의 신학적 관점과 믿음의 형태가 다르다 할지라도 존중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한다면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죠. 사람 차별하는 것만은 부모형제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제가 살아온 방식이고, 이것만은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다고 감히 자부를 합니다.
김 형, 요즘 부쩍 ‘하나님의 축복’을 자주 거론하더군요. 그런데 예수 믿으니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받아 복을 누려야 한다는 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보다 더 떠 받드는 성서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아시죠? 공의의 하느님이고 사랑의 하느님이란 신앙고백은 성서 곳곳에 수 없지 나오지만 ‘너희만 특별히 축복받아라’는 구절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예수께서는 그냥 사랑이 아닌 ‘원수를 사랑하라’는 준엄한 명령과 함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명토박아두었습니다.
신약성서를 먼저 기록한 바울 사도 역시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다”며 “사랑은 불의와 함께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힘든 이웃과 함께 하고 ‘약자를 사랑하고 그들의 편에 서라’고 했으나 ‘너희들만 특별히 복 받아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약자에 대한 편애’라고 신학자들은 한결 같이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린 분명히 21세기에 살고 있고 온갖 문명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재해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장시’는 신자들에게 마약을 계속 주는 것이거나 무당 푸닥거리와 다를 바 없다고 저는 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는 목회자는 보기 힘든 이 시대가 기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만 하네요. 또 물고 늘어진다고 타박하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하는 말 중에 틀리거나 황당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믿는 줄 아시기에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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