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게 의학계가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나라처럼 탈이 나야 치료를 하는, 예방의학 체계가 전무 하다시피 한 의료체계에서 전 국민 ‘주치의 제도’를 도입해 발병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발병해 치료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하고 있다. 질병이나 각종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주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예전에는 통증을 증상 중의 하나로 봤지만 요즘은 그 자체를 병으로 보고 통증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진료과가 생겼다. 누구나 예비 환자로 살면서 건강하지 못한데서 오는 각종 통증을 느끼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두통이나 어깨ㆍ허리 등의 통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통증은 신경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이면서도 그 자체가 질병으로 우리 인체가 통증을 느끼는 것은 신체 외부를 둘러싼 피부에 분포된 ‘통각수용체’라는 세포에서 시작된다. 각종 사고나 병으로 상처를 입으면 뇌를 통해 통증억제 호르몬이 분비되어 고통을 덜 느낀다.
인체의 통증 체계에 이상이 생기면 만성통증으로 이어지는데 대부분의 통증은 잠시 성가신 존재로 시간이 지나면서 낫지만 계속되는 통증은 사람을 괴롭히는 아주 위협적인 존재다. 만성통증은 불쾌한 기분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두뇌를 상하게 하고,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하는 등 심각한 문제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게 국내 의학계 현실이다. 상처 부위에서 시작된 통증 신호가 신경계 전체에 전달되면서 자극에 대한 반응이 강화되어 전두엽 외피의 퇴화를 가져 오며, 등이나 어깨에 만성 통증이 있을 경우 전두엽 외피 전체의 부피가 줄어들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통증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성격이 별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게 우리 현실이다. 병은 자랑하라’는 속담은 남의 나라 말이 된지 이미 오래다.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만성통증 때문에 한 쪽 팔을 사용할 수 없다면 ‘팔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유럽 복지 국가 대부분은 인정한다. 뿐만 아니라 국내 통증전문의사와 재활의학과 의사들도 ‘팔이 아파서 사용하지 못 한다면 노동 능력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만성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에 불편은 물론이요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중증 장애로 보고 국가에서 돌보는 게 유럽 복지국가들의 공통점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산재사고 후 치료를 종결할 때 실시하는 ‘장해심사분류표’를 보면 ‘심한 통증’의 경우 장해 12급으로 겨우 평균임금 90일치만 주고 그것으로 끝내 버린다. 12급 장해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음은 물론이다. 십년 넘게 통증으로 시달리고 주치의사의 소견이 있어도 근로복지공단은 인정하지 않고, 기초생활수급권자 장애 심사 역시 별 다를 바 없다. 이는 장애판정방법이라는 제도적인 문제와 함께 심사를 통증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통증의학ㆍ재활의학과 의사들이 하는 게 아니라 수술 후 ‘붙어 있으면 괜찮다’는 외과 의사들이 하기 때문이다. 장애심사 제도를 바꾸고 심사의사들을 바꿔야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만성통증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밥그릇 때문에 칼자루를 잡고 있는 외과의사들의 기득권을 제도적으로 박탈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심지어 자기공명상촬영(MRI) 결과 이상이 있다고 나타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만성통증환자들은 노동도 하지 못하고 기초생활수급지원금도 쥐꼬리 만해 삶의 나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통증전문의사가 ‘통증으로 인한 이상이 있다’고 해도 다른 의사들은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잘라 버린다. 이런 현실에서 사고 후유증으로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희망이란 말은 사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설 곳이 없는 그들은 극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최근 산재환자들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통증으로 팔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 어깨 통증으로 진통제를 먹어도 아파서 고생하는 국민을 방치하는 나라 대한민국. 세계 경제규모 13위의 나라가 이래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
추 가: 위의 사진은 주택가에 있는 스위스의 어느 재활병원. 병실이 집처럼 아늑하게 꾸며져 있고 환자가 편하게 아무 옷이나 입도록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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