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제도는 어떻게 진화 하는가?

녹색세상 2008. 4. 22. 16:40
 

학교는 오래도록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한 교장 단독으로 움직이는 기계적인 조직이었다. 학교의 구성원인 학생ㆍ교사ㆍ학부모를 옭아매는 중요한 결정 사안은 교육부ㆍ교육청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 일선 학교로 하달되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이런 숨 막히는 공간에 처음으로 출현한 아래로 부터의 의사기구다. 일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돈 좀 있는 학부모들로 구성되었던 예전의 육성회와 별로 다르지 않게 굴러가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들이 선출하는 학부모 운영위원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형편이고, 교원 위원도 교장이 임명하다시피 하거나 전교조 조합원들이 있을 경우는 그나마 상의해서 사전에 조율한다. 지역위원들 역시 교장과 친분이 있는 전직 교육 관료나 지역유지들이 태반인데 외부 인사들 진입을 막으려고 교장들이 혈안이 되어 있다.

 

▲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르짖는 영화배우 김부선 씨의 심상정 선거운동 모습. 자신의 삶 속에서 사회 모순을 깨우친 내공 깊은 사람이다.


거기에다 운영위원회가 의결기구가 아니라 심의기구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안을 내도 결정권자인 교장이 거부하면 그만이다. 학부모 위원들은 교장의 눈에 벗어나면 아이에게 불이익이 돌아갈까 봐 입 다물고 있다. 교장과 마짱 뜰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대부분의 교장들은 학교운영위원회를 불편해 하지만 ‘입 다물고 본전이나 찾자’는 학부모 위원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일부 학교를 제외하고는 파행적으로 운영된다. 많은 학부모위원들은 교장과 교사들이 원하는 대로 거드는 게 자기들의 역할로 생각하고 ‘도우미’선에서 마무리를 한다. “예전에 비해 민주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는 기구나 과정은 많이 갖추어져 있지만 내용을 못 채우고 있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주적인 결정과정은 지시나 명령에 비해 ‘귀찮고 피곤한 절차’를 동반해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민주적인 뭔가를 하려면 생각하고 토론해야 하고, 결정 사랑을 집행해야 하지만 ‘옛날대로 하려는 사람’들과 부딪치기 마련이다. 여건이 그렇다 보니 교사들이 ‘문제는 있지만 내가 참고 말자’라든가 교실에서 학생들과 지내는데 큰 문제가 없다면 학교 내부의 민주화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나서길 꺼린다.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거나 지도하는 동아리 학생들의 일이 아니면 막걸리 한 잔 하면서 교장ㆍ교감 욕하는 선에서 끝나곤 한다. 심지어 전교조 활동 교사들을 ‘심부름센터’로 여기고 자신과 관련한 일로 직접 부딪치기 부담스러울 경우 ‘대타’로 악역을 떠맡기는 경우가 학교 일선에서 비일비재하다.


핵심 사안에 대한 지침은 위에서 내려오지만 학교 단위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조차 교사들이 주체적이지 못하면서 ‘민주시민교육’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월없이 흘러가지만 문제를 던지는 순간부터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안다. 함께 활동을 한 오랜 동료들이 지쳐 하나둘 씩 떠나고 그 빈자리를 새로 들어온 후배 교사들이 채워 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자신들도 ‘힘들고 지치지만’ 민주주의를 누리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기에 현장을 지키고 있는 교사들이 있다. 제도를 도입하는데 투쟁이 필요했다면 원래 취지대로 운용하는데도 부딪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다. 제도란 백지 위에 쓰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ㆍ집단주의ㆍ학벌과 연고ㆍ가부장제가 오랜 세월 짓눌러 온 현실 속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현실과 부딪치면서 제도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고, 제도는 문서상의 글자로 남아 있는 규정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살과 피를 얻는다.


부딪침은 현실을 변화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부딪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자신이 치러야할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무임승차 하는 것은 ‘입을 여는 사람’들에게 미필적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혼자 말하는 것, 모두들 피하는데 나 혼자 부딪치는 게 구조적인 문제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영화배우 김부선 씨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사소한 문제를 각자의 영역에서 인습과 맞서 이기는 과정이 민주주의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면서 제도 또한 진화를 거듭한다. (우리 시대 희망찾기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