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성역 이데올로기―목사에게 대적하면 저주 받는다?

녹색세상 2008. 4. 20. 22:01
 

젊은 목회자가 교회개혁운동에 뛰어든 사연


몇 대째 기독교(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보수 교단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 청년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과 교회 내의 차별, 인권이나 교회 개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살았는데 몇 번의 충격적인 경험을 하면서 교회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평소에는 경건하고 은혜스러운(거룩한) 교인들이나 목사의 관계가 갈등을 겪으면서 세속의 패싸움 뺨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치닫는 모습을 충격을 받았으며, 급기야는 교단총회장 선거에 조직적으로 거액의 돈을 뿌리는 광경을 가까이에서 본 뒤 양심선언을 했다. 총무원이나 길목이 좋은 사찰 접수를 위해 용역깡패를 동원하는 불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사탄의 무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한 부패상에 질려 버린 것이다.

 

▲빵모자는 쓴 사람은 오규섭 목사로서 투쟁의 현장에 함께하며, 수요일 마다 노자사상 공부를 할 정도로 내공이 깊다. 승려처럼 머리를 밀어 처음 보는 사람들은 승려로 보기도 한다.

 

‘하느님이 있는데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교단 총회장은 임기 1년 임에도(감리교는 다름) 불구하고 서로 하려고 박 터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관례적으로 각 지역 별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3~4년 전부터 준비를 하고 조직 선거가 필요한 지역에 자기 밑에 있던 부목사들을 보내 밥을 사고 돈 봉투를 돌린다. 뿐만 아니라 성매매업소에 가서 접대를 한다는 말을 젊은 목사들로 부터 들은 게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가장 큰 교단인 예장통합의 경우 큰 거 13~15장이 들어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보수 정치권 뺨치는 금권ㆍ조직 선거가 판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동업자 의식으로 뭉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교회 안에 세속적인 가치와 기준, 세상의 권력 관계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믿었던 어쩌면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 청년은 돈 살포 선거를 직접 겪으면서 “신앙은 객관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인 상식으로 통해야 한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로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가장 민주적일 때 가장 건강하다’는 신념을 직접 실천하는 일에 뛰어든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해 투쟁한 학생운동이나 자본의 폭력에 맞서 방어 수단으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하느님께 기도해라.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입에 거품 물던 사람들이 자본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


목사에 대한 비판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


개신교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은 거의 대부분 ‘목사의 지도력과 사생활, 교회 세습과 사유화’를 둘러싼 철저한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얽힌 것이고 이러한 것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해결방식은 거의 비슷한데 상층부에서 ‘없었던 일로 덮어 버리거나’ 그 목사를 내 보낸다. 천주교의 경우는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교구청에서 대기 발령을 내거나 전출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여성 교인들이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목사님을 유혹한 마귀’로 둔갑해 생매장을 시켜 버린다. 대구 중구의 모 교회 담임 목사 역시 여신도와의 관계로 말썽이 났는데 담임 목사를 사임하는 대신 신학대학 총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연금을 교회에서 교단연금관리재단에 매달 납부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부터 퇴직금을 두둑이 받았음은 물론이다. 개인끼리의 문제를 남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서로 좋아서 생긴 일임에도 여성만 ‘마귀’가 되는 희한한 곳이 교회다. 한국의 대부분 교회는 ‘목사를 비판하면 하느님한테 벌 받는다’는 저주에 가까운 학습을 수 없이 해댄다. 그것도 예배 시간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설교를 통해서.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에다 무당 푸닥거리가 결합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목회자는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니 가만있으라’는 논리는 왕권신수설과 동일한 것으로 ‘만인사제주의’를 외친 종교개혁정신과는 완전히 반대다.


이 논리 구조를 따른다면 ‘목사를 비판하는 것은 하느님을 욕보이는 것’으로 신성모독이 된다. 건강한 비판을 받고 그것을 수용해야 발전이 있음에도 원천 봉쇄를 하는 강력한 차단막 안에 안주하니 퇴보를 할 수 밖에 없다. 신앙공동체라는 핑계로 ‘세상 지식으로 논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성역과 시킨다. 의문을 제기하는 건강한 문제의식이 있는 교인들을 매도한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은 반납’하고 철저히 목사 위주로 ‘신학 없는 목회’를 ‘은혜 스러운 교회’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21세기의 온간 문명 혜택을 누리면서도 교회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이성적인 판단과 뇌기능은 멈추고 기원전으로 되돌아 가 버린다.


그래도 성역은 없애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 대부분은 목사의 문제이며 목사들이 결정권을 독점적으로 휘두르는데서 나온다. 금란감리교회 김홍도의 경우처럼 회계장부를 조작해 교인들의 피땀인 공금을 횡령하고, 그 돈으로 각종 선거에 돈을 뿌리고, 간통사건 합의금과 변호사 선임비도 내고, 자신의 비리를 취재해 방송하려는 시사프로그램의 방영을 막으려 정치권에 줄을 대는 등 난리를 쳤고, 형사처벌을 받자 자기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세습시켰다. 서울 광성교회 분규로 일어난 교인들끼리의 폭력 사건은 그들이 ‘이웃사랑’을 말하는 예수를 따라는 사람들이 맞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평소 거룩한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동서남북 온갖 쌍욕이 다 튀어 나오고, 제직회에 건장한 어깨의 용역깡패까지 동원해 목사 경호를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


‘뜨거운 신앙’을 자랑하는 오순절계통의 대구순복음교회의 분열 역시 광성교회와 거의 비슷하게 치달아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없고 ‘상처뿐인 영광’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부목사나 전도사들인데 담임 목사가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어 꼼짝을 못한다. 담임 목사의 동의 없이는 부목사가 다른 교회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충성을 맹세하고, 충성의 대가로 교인이 좀 있는 교회 담임 목사가 되고 같은 짓거리를 되풀이 한다. 큰 교회 부목사나 전도사들이 무르팍 걷어차이고 쌍욕 얻어먹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래도 ‘교회개혁은 한국사회 개력’이라는 실천적인 신학의 일념으로 교회개혁운동에 동참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요원한 게 사실이다. 인류역사를 보면 종교는 ‘사회변혁에 무임승차’를 했지 앞에서 투쟁한 적이 거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변혁을 말하는 기독교신자들 대부분은 ‘교회개혁’에 대한 미련을 버린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역은 무너뜨리고 없애야 한다. 참, 얼마 전 은퇴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는 30여명의 경호원들이 따라 움직인다. 목사란 사람이 목숨을 노리는(?) 적이 얼마나 많기에 국무총리급 경호를 받으며 다니는지 모르겠다. 하느님이 지켜주시지 않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