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장기복무 심사 있지? 오늘밤 같이 있자”

녹색세상 2008. 4. 25. 21:14

 

01년 ‘사단장 성추행사건’ 이후로도 계속되는 여군 대상 성폭력


“한겨레21에 보도된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을 읽고 주변에 친하게 지내는 여성 부사관 몇몇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게 뭐 대수냐’고 하더라고요. 여성으로서의 고충은 회식 자리에서 ‘술 따르라’는 말을 듣는 정도로 짐작했었는데, 실제는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남성 중위)

 

 

“비일비재했죠.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강제로 껴안고 입맞춤 시도했다가 어느 지휘관이 징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이런 일이 또 있네?’ 하고 말았죠. 그런데 헌병이나 기무에 알려져 정식으로 처리되는 경우는 아주 일부에 불과해요. 그중에도 사회에 알려지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요.”(대위로 전역한 여성)


임신한 여군 배를 보며 “만져 봐도 되냐”


높은 담장이나 철조망으로 사회와 격리된 군은 성폭력의 사각지대였다.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 보도 이후 2주 동안 ‘한겨레21’이 접촉한 전ㆍ현직 여군들은 성희롱 언사에서부터 육체 접촉을 수반하는 강제추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폭력이 군대 안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피해를 입고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또 다른 피해를 우려해 개인적으로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휘관(장군)이 주최하는 영관급 장교 회식에 참석 대상도 아닌 나더러 참석하라기에 가봤더니 ‘너를 왜 불렀겠냐? 저쪽 자리에도 가서 술 좀 따라드려라’고 말하더라고요. 기분이야 나빴지만, 군 생활 그만할 것도 아니고, 억지로 웃어가며 술을 따를 수밖에 없었죠.”


지난해 육군 대위로 전역한 한 여성이 털어놓은 술자리 성희롱 사례다. 그는 “대다수 여군들이 이런 경험을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이밖에도 “정색하고 문제 삼기는 어렵지만 너무 불쾌한” 성희롱 경험이 많았다. 현역 대위인 한 여군은 “지금은 그런 상관이 없겠지만, 몇 년 전 초임 장교 시절 ‘이년아’ ‘저년아’라고 부르는 상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하지만 같은 남성들끼리는 ‘이 새끼’ ‘저 새끼’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자라고 나만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아 꾹 참고 지냈다”고 말했다. 계급이 낮고 나이도 어린 여성 부사관들을 상대로 한 성희롱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다. 군생활 4년차라는 한 여성 부사관은 “1~2년 전에 ○○사령부에서 장교가 임신한 여군의 배를 보면서 ‘배 많이 불렀네, 만져 봐도 되냐’ ‘가슴도 많이 나왔네’라고 말한 일이 있다”며 “너무 큰 모욕이어서 그 부대 여군들 사이에 이슈가 된 바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 여성 부사관은 “나이 든 상관들이 나이트클럽에 가서 누구를 만나 뭘 어떻게 했다는 등의 음담패설을 늘어놓곤 하는데, 불쾌하지만 말도 못하고 혼자 괴로워하는 중”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옮겨간 부대까지 찾아가 괴롭혀


가해자와 같은 처지인 남성 군인이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성희롱이 다반사인 부대도 있었다. 최근까지 장군과 대령 등 고위 장교들이 많이 근무하는 ○○사령부에서 근무했다는 한 위관 장교(남성)는 “승진 누락이 확정된 고참 영관급 장교들은 더 이상 눈치볼 일이 없어진 만큼 매사에 거침이 없는데, 여군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며 “20대 여성 부사관들을 사무실로 불러 심부름을 시키면서 ‘샴푸 뭐 했어? 냄새가 좋은걸’ ‘요새 운동해? 몸매 아주 좋아졌어’와 같은 민망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말했다.


특히 부사관에게는 장기복무 심사를 매개로 성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도 나왔다. 소속 부대와 계급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한 위관 장교는 “얼마 전 절친하게 지내는 여성 부사관이 고민이 있는 것 같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님(영관급 장교)이 며칠 전 오늘 밤 같이 있자고 말했는데 거절했다’며 한숨을 쉬더라”고 말했다. 장기복무 심사에 영향력을 끼칠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는 얘기였다. 이 장교는 “그 말을 하던 순간의 부사관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기본적으로 근무평점 등에 근거해 장기복무 심사가 이뤄지겠지만, 심사위원 가운데 한 명이 특정인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 삼으면 그 사람은 (통과가) 어렵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소속 부대를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여성 부사관도 “동료들 가운데 치근덕대는 상관에게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했다가 ‘그래서 장기(복무) 하겠어?’라는 답을 들었다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강제추행은 성희롱보다 횟수는 적지만 훨씬 큰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일단 피해자가 입는 충격의 강도부터 비교가 안 될뿐더러, 사건이 공론화됐다가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입는 황당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한때 사단급 부대에서 여군 고충상담책임관으로 일했던 한 여성(대위 전역)은 자신이 관여했던 사건을 털어놨다. 2003~2004년께 강원 춘천의 한 부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대대 간부 회식이 열렸는데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대대장이 여군 중위를 안고 억지로 블루스를 췄어요. 대대장은 더욱 술에 취했고 그러는 사이 다른 간부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어요. 어느새 노래방에 여군 중위와 단둘이 남게 된 대대장은 갑자기 억지로 여군 중위를 껴안더니 입맞춤을 시도했고, 깜짝 놀란 여군은 울면서 노래방을 뛰쳐나왔죠. (상관인) 정보작전장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빨리 와 달라’고 호소했지만 나오지 않았다더라고요.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하던 중위가 상담 차 여군 선배에게 털어놓으면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됐는데, 대대장이 평소에도 자기 혼자 머무는 관사에 이 중위를 따로 부른 사실 등이 조사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졌죠.”


이 사건의 가해자인 대대장은 결국 징계를 받았고 얼마 뒤 전역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자인 여군 중위 또한 온전한 군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증언하는 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대대장 평판이 괜찮은 사람이었나 본데… 그래도 그렇지 대대 다른 간부들이 여군이 옮겨간 부대에까지 찾아가 ‘너 때문에 우리 훌륭한 대대장님이 전역하게 됐다’며 괴롭혔더라고요. 회식 장소에 둘만 남겨두고 자리를 피하고, 도움을 요청할 때는 나타나지도 않던 사람들이 되레 그 여군 중위를 죽일 년으로 만든 셈이죠. 그 중위는 부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장교로 지원해 임관된 간부사관이었는데, 이런 경우는 거의 100% 장기복무 지원자예요. 그런데 결국 의무복무 기한인 3년만 채운 뒤 희망 전역했죠.”

 

 △ 미온적인 대처가 이어지는 사이, 군대 안에서는 끊임없이 여군 대상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군대의 수치임에 분명하다. 2005년 육군3사관학교 임관식.



이와 유사한 사례는 최근 국정감사 현장에서 잠시 언급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25일 국방부 군사법원 국감장에서 노회찬 의원(진보신당)은 부하 여성 장교의 손가락을 만지며 “나 닮은 아이 하나 낳아달라”고 말한 육군 대대장을 무혐의 처분한 점을 들어 “지휘관들이 결재받으러 온 부하 여성 장교의 손가락을 만지는 것이 군문화냐”며 군 수뇌부를 추궁했다. 사실 여군을 대상으로 한 남성 상관의 성폭력 문제는 가끔씩 언론에 보도됐다. 지난 2001년 1월의 이른바 ‘사단장 성추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육군 전방 사단의 김아무개 사단장이 위관급 여성 장교를 회식 장소와 집무실, 공관 등에서 성추행한 사건이었다. 20대 여군의 엉덩이를 만지고 입맞춤을 시도한 혐의를 인정해 김 장군을 직위해제한 군 당국은 “앞으로도 군대에서 발생하는 성적 군기문란 사범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엄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사상 최초로 장군이 군내 성폭력 문제로 자리에서 쫓겨난, 여군 상대 성범죄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제보한 피해자 누구인지 금방 알려져


그러나 이후로도 바뀐 건 별로 없었다. 2003년에는 영관급 군의관이 간호장교를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고, 2004년 6월에는 찜질방에서 잠자던 여군 부사관의 몸을 더듬은 혐의로 이 아무개 소령이 구속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해군 함장이 여군 장교를 성추행해 징계위에 회부됐다. 하지만 이러 사건들은 언론에 단신으로 처리되며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졌고, 군 당국이 약속했던 ‘엄한 처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미온적인 대처가 이어지는 사이, 군대 안에서는 끊임없이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는 6월에 전역 예정이라는 한 여군 대위는 “지휘관은 자신에 대한 평정을 쓰는 사람인데, 군 생활 오래할 생각이라면 어떤 여군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겠냐”며 “사고가 터지면 높은 사람들은 ‘왜 얘기 안 했냐’고 말하는데, 이는 헌병대에 신고하면 사고 사례로 처리돼 군 생활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여군은 소수여서 제보한 피해자가 누군지 금방 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육군이 아닌 한 여성 부사관도 “매년 초 여군간담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성희롱과 성추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며 (설문이) 공란으로 만들어져 돌긴 하지만, 여기에서도 특정인이 지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신고를 꺼려해 무거운 성범죄도 대부분 은폐된 채 넘어간다는 것이다. 실제 2004년 국방부 의뢰를 받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군대 내 양성평등 현황 분석 및 확산방안 연구’를 보면, ‘성희롱을 문제 삼으면 결국 피해자인 여군만 손해 볼 뿐이다’라는 항목에 여군 응답자 대부분이 ‘정말 그렇다’(36%) 또는 ‘대체로 그렇다’(47.5%)고 답했다. 한 여성 부사관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성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드러낸다고 해서 인식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안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기는 남자들이 다수이고 여자는 소수다”라며 “들어올 때부터 성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처신을 잘못했다고 여군만 당하기 때문에 그냥 신고하지 말라는 얘기를 훨씬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얼마 전 인근 부대에서 여군을 상대로 성범죄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한 여군 장교도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미묘한 말을 남겼다.


“군대도 많이 달라지고 있고, 좋은 상관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군에도 분명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뭉치면 진실도 진실이 아닌 것이 돼버린다는 것입니다.” (한겨레21/이순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