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이 친구 자살한 거 밖에 말하지 말랬어요. 그냥 쉬쉬하며 넘어가자는 건데, 이건 아니잖아요? 어제까지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고 공부만 해라? 내가 자살해도 똑같겠죠. 학생 가르치는 학교가 이래도 돼요?”
고3 김수현(가명)양의 눈은 금방 충혈 됐다. 김양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침묵. 고개를 돌려 학교 쪽을 바라본 뒤 손으로 눈을 훔쳤다. 다시 연 입에서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친구가 자살한 15일에도, 그 친구가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던 17일에도 똑같이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던 친구는 배신을 이야기했다.
“친구의 자살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에요. 그런데 '친구 자살한 거 외부에 알리지 말라'라는 선생님 말 들으니까···. 다시 가슴에 ‘배신의 대못’이 박힌 것 같아요. 정말 배신감 느껴져요.”
▲ 심야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사진: 오마이뉴스)
‘친구 자살 외부에 알리지 말라? 배신감 느낀다’
지난 15일은 수능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시험을 치고 친구들과 답안을 맞춰본 뒤 A양의 얼굴은 굳어졌다. A양은 친구들에게 ‘시험을 잘 못 봤다’고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A양은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14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기 전 A양은 같은 반 친구들 몇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대부분 꺼져 있었다. 학교는 학내에서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하고 하교할 때 돌려준다. 학교가 보관하고 있는 동안 휴대폰은 당연히 꺼져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A양은 대답 없는 한 친구의 휴대폰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학생들은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아닌 일반 안부 인사였다’고 말했다. A양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던 친구들은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다고 한다. 단지 모의고사를 못 봐서 A양은 죽음을 선택했을까? 물론 하나의 원인이 될 수는 있다. A양과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한 친구는 “2학년 때 시험을 망쳤다고 울었던 적이 있었다. 성적에 민감한 아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시험 한 번 망쳤다고 자살할 친구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A양은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에 속하며 지난 3월 모의고사에서는 전교 7등을 했다. 한 해에 약 20여 명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교이다 보니 A양의 친구들은 “그 성적만 유지하면 서울대에 충분히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17일과 18일 기자는 A양이 다니던 특목고의 정문과 후문에서 무작정 기다리면서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물론 ‘밖에서 말하지 말라’는 말에 충실하며 기자를 피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지만, 많은 학생들이 A양의 죽음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학생들은 단지 시험 점수가 아닌 ‘등수 공개’라는 부담을 이야기했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김 모 군은 “A양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학교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나. 바로 3월 모의고사에서 최양이 받은 성적과 등수가 기록된 게시물을 학교에서 철거한 것이다. 학교는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면 전국 상위 1% 안에 든 100명 안팎의 학생 명단과 전국 백분위 비율을 공개한다.”고 말했다. 김 군의 말대로 학교가 학생들 성적을 게시판에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학교는 모의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나오면 항상 상위 학생들의 성적을 공개했다. 그러나 올해는 특별했다. 바로 ‘수능 등급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능 등급제 때는 언어, 수리, 외국어 등 각 과목별로 1등급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연히 누가 전교 1등인지 100등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능등급제가 사라지고 점수제가 실시되니 1등부터 꼴등까지 서열이 확실히 정해졌다. 올 3월 모의고사 점수가 나온 뒤 이 학교는 1등부터 약 100등까지 ‘서열’을 게시판에 붙인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는 우리들 분발하라고 붙였겠지만, 서열이 정해지니까 게시물에 내 이름이 들어가도 걱정이고 안 들어가도 걱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상당수 3학년 학생들은 “A양이 성적 공개에 부담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2학년 때 A양과 같은 반이었다는 한 학생은 “2학년 때도 모의고사 못 봤다고 눈물을 흘릴 만큼 성적에 민감한 친구니까, 당연히 성적 서열이 공개되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또 “4월 모의고사를 잘 못 봤는데, 등수가 떨어진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공개되는 게 A양에게는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것이 A양이 자살을 선택한 직접적인 동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등급이 아닌 점수와 서열 공개를 비판했다.
▲ A양이 투신 사망한 장소. 18일 누군가 흰 국화 한 송이를 남겼다.
학교장 ‘그냥 교사들끼리 일 처리할 걸’
그렇다면 학교 측은 A양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학교 측은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다. 17일 오후 학교에서 만난 교장은 “아니,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렇게 될 바에는 그냥 우리 교사들끼리만 알고 조용히 일(A양의 죽음)을 처리했어야 했는데, 괜히 학생들한테 이야기했네. 다른 교사들을 쳐다보며 기자한테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세요.”라고 말했다. 스승과 제자를 말하고 교육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교장은 “좋은 일도 아니고 아이들이 민감한 시기니까, 학교와 학생을 위해서 그냥 돌아가 달라”고 말했다. 몇몇 교사들도 교장의 지시에 따라 “미안하다,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끝까지 취재를 거부했다.
학교에서 나와 A양이 살던 아파트로 향했다. A양의 집은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A양이 추락한 아파트 화단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A양이 사망한 곳에는 작은 산수유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노란 산수유꽃은 거의 진 상태였다. 18일, 누군가 그곳에 흰 국화 한 송이를 남겼다. 수분을 빨아들일 수 없는 국화는 금방 시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장소를 무심하게 오갔다. A양이 사망한 15일 교육과학부는 0교시 및 심야자율학습 부활, 우열반 편성 가능 등이 담긴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김도연 교육과학부 장관은 이 계획발표에 ‘전 국민들이 환영하고 좋아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2세들을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으로 내몰고도 ‘좋아할 것’이라는 말이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주무부서 장관의 입에서 나오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서글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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