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군복무 부적응 사고 ‘방아쇠’

녹색세상 2008. 1. 18. 00:25
 

  2005년 경기 파주에서 중대 행정병으로 군 복무 중이던 배아무개(29)씨는 입대한 지 다섯 달 만에 아침체조를 하다가 쓰러졌다. 그 뒤 말을 못 하고 걸음을 이상하게 걷던 배씨는 심리적인 원인으로 운동·감각기능에 결함이 발생하는 질병인 전환장애로 진단받고 지금까지 정신과 병원에 입원 중이다. 대학원을 다니다 남들보다 늦게 입대한 배씨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등 군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배씨의 입대 동기인 유 아무개씨는 “배씨가 한 간부로부터 ‘그딴 식으로 하려면 때려쳐, 너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등 심한 질책을 받고 울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2006년 초 배씨를 전역시켰으나, 부대 간부들에 대한 징계는 내리지 않았다.

 

 


  배씨처럼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통을 겪는 병사들이 상당수에 이르는데도 이들을 도울 제도는 갖춰지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7일 이화여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2006년 육군 5개 사단 등 병사 9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103명(10.9%)이 ‘군 복무 부적응자’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군 복무 부적응 병사 대부분은 군 생활을 어렵게 하는 이유로 선임병과의 갈등이나 비합리적인 군대문화 등 군대 내부 요인을 들었다.(그래프)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군대 내부의 요인이 부적응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들은 사적인 명령이나 언어폭력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런 어려움을 윗선에 보고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군 복무 부적응자의 82.6%가 “부대의 조처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답했고, 군대에 잘 적응한 병사들의 54.5%도 “부적응 병사들에 대한 군의 조처는 효과가 없다”고 답했다.


  이렇게 방치된 군 복무 부적응자들은 각종 인권침해를 당하는가 하면 자살, 탈영 등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리기도 한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인권위에 접수된 군대 내 사망사고 사인규명 진정 107건 가운데 38.3%인 41건이 군 복무 부적응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 2006년 육군 사고 통계를 보면, 모두 1085건의 군무 이탈 사고 가운데 697건(64.2%)이 군 복무 부적응이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징병검사 단계에서부터 병무청과 훈련소 등에 임상심리 전문가를 확충해 군 복무 부적응 예상자를 미리 가려내고 △군 자체 심리치료 프로그램인 비전캠프 예산을 늘리고 △병사와 간부들의 다양한 의사소통 창구를 활성화할 것 등을 국방부 장관과 병무청장에게 권고했다. 이기성 인권위 침해구제1팀 조사관은 “군 복무 부적응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는 문제”라며 “부적응 병사에 대한 대책이 곧 군 발전의 핵심적 사안이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겨레/이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