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과 사회적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씁쓸함을 느꼈다. 그 씁쓸함을 불러일으킨 요인 중 하나는 같은 문제를 앓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성폭력의 공포와 피해,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어느 한군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감춰진 성폭력의 온상지, 교회
수년 사이에 끊이지 않는 교회 목회자들의 성추행 사건들, 그리고 최근 필리핀 선교사가 현지 소녀들에게 성폭력 또는 성매매를 수차례 행했다는 소식은 교회가 성폭력 문제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좀 더 거칠게 말해서 한국교회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어두운 온상지가 되었다. 교계 소식통들 사이에 특종거리로 떠돌며 수많은 교인들에게 불신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교회 내 성폭력으로 알려진 사건들은 기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누누이 저질러진 여성에 대한 폭력의 우연한 돌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폭력 현실과 관련해서, 얼핏 떠오르는 두 가지 기억을 소개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의 불의한 관행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성상납이 유사한 구조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렸을 적에 목도한 일이 있다. 일부 인기 있는 부흥사들 사이에 여자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마치 특권처럼 행해진다는 소문이 실제로 인근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소문의 당사자인 부흥사는 그 뒤에도 별 문제 없이 목회와 부흥사역에 전념했지만, 또 다른 당사자인 여자는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또 하나는 최근에 서울의 어느 지역에서의 일이다. 어느 날 그 지역에 있는 어떤 교회의 목사가 교회 반주자였던 여고생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해온 일이 드러났는데, 그 일을 알게 된 몇몇 사람들 간의 은밀한 회합 끝에 교인이었던 피해자의 가족들이 그 일을 무화하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나는 그 가족들의 결정이 어떤 심리와 경로에 의한 것인지가 자못 궁금했는데, 정확한 소식통에 의하면, 처음엔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던 피해자의 부모는 목사에게 성폭행당한 딸을 하나님께 드린 셈 치겠다고 공표했단다. 아마도 그들이 그 일을 드러내거나 상처를 표현하기엔 교회 구조와 신앙 양태 자체가 너무도 억압적ㆍ보수적이었을 테고, 대신 그들이 선택한 믿음 체계에서 하나님은 어린 딸을 성폭행한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늘 그랬듯이 이러한 교회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한 일각의 비판에 대해 한두 교회, 한두 사람의 일을 가지고 전체를 욕보이지 말라고 맞서는 이들이 있다. 과연 그들이 이러한 일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믿을 만큼 무지하고 순진한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미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계명과는 저만큼 동떨어진 교권 수호자들에 불과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교회 내 성폭력을 일반 사회에서의 성폭력보다 더 어둡고 절망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이 사회는 더디게라도 성폭력 문제와 그 상처를 드러내고 피해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고양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교회는 여전히 잠잠과 침묵, 또는 축출로 일관하려 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침묵과 냉소, 교권 수호주의야말로 교회를 더욱더 감춰진 성폭력의 온상지로 만드는 요인이다.
침묵은 또 다른 폭력
교회 내 성추행ㆍ성폭력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성적행위는 필시 폭력적인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는 불균등한 힘의 관계와 구조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두 사람 간의 합의에 의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대부분 훨씬 더 큰 힘을 소유한 목회자에 의한 강제적 특성을 띠게 된다. 또한 목회자를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배워온 평신도로서는 목회자의 성적 접촉을 거부하거나 ‘안 돼’를 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균등하지 않은 힘의 관계에서 목회자에 의한 성행위는 강제적인 추행과 폭력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불평등한 힘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성행위는 그 관계가 끝났을 때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 이용해버린 결과를 낳는다. 이때 두 사람 중 더 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미 미국의 많은 교단들은 교회 안 성폭력 문제에 직면해서 누가 먼저 유혹했는가를 묻는 대신, 누가 더 피해를 입게 되는가, 안전하고 품위 있는 관계 유지의 능력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질문한다. 상대 평신도와의 관계를 조절ㆍ통제할 전문적인 능력과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음을 자각할 때, 교회 안 성추행 사건에서 대부분 목회자는 ‘가해자’이고 평신도는 ‘피해자’가 된다. 이 점을 도외시할 때, 현행의 많은 한국교회들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다수의 가해자들이 소수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그들의 행위를 왜곡하고 교회 밖으로 축출하는 결과로 치닫게 된다.
또한 교회 안 성폭력이 철저한 힘의 관계의 맥락에서 발생한다고 할 때, 한국과 같이 여성을 성적 대상물이나 노리개ㆍ접대부로 취급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강고히 자리 잡은 사회에서 남성 목회자에게 다수의 여성 교인들은 목회의 대상인 ‘교인’보다는 ‘여성’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이번의 필리핀 선교사의 성폭력에서 볼 수 있듯이, 선교 주체인 한국의 남성 선교사에게 피선교지의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선교의 대상보다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권력관계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기, 생존과 치유의 길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은 피해자의 삶, 때로 가해자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신앙공동체를 위기로 몰고 간다. 깨어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탐내다가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만든 것처럼, 아무리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혐오스러운 측면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당사자 목회자의 성행위가 한순간의 실수였는지 성격 장애로 인한 습관적인 것인지를 분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 회중과의 영적ㆍ인간적 관계 증진을 위한 지도력과 관계 맺기 능력을 함양하고, 이성적 존재들을 성적 대상물로 고착하는 대신 그들과 다양하고 적극적인 동료애를 공유하려는 노력도 중요할 것이다. 교단적으로는 개별 목회자들의 영적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범교회적인 방지책이나 해결방안을 공적인 방식으로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긴급한 일은 피해자 여성들에게 스스로 말하게 하고, 모든 구성원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본다. 말하지 않고 감춰둔 고통과 폭력은 같은 종류의 폭력으로 반복되어 나타날 테고, 치유는 말하는 가운데 시작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입을 열어 그 문제를 공공연히 말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정의롭고 올바른 정보에 스스로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교회 안 성폭력에 대한 해결책은 여전히 묘연한 일이다. (당당슈느/정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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