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폭력을 용서하고 이해하라고?

녹색세상 2008. 1. 9. 16:50
 

  이해를 영어로는 understand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눈높이를 맞추는 게 아니라 아래에 선다는 것이다. 상대의 아래에 서야 제대로 보인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용서란 말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 용서의 전제 조건은 먼저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자가 ‘재발 방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몇 마디 말로 하는 용서는 말장난이다. 큰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겪는 정신과 질환 중에 ‘외상후스트레스 증후군’과 ‘공황장애’란 병이 있다. 특수한 상황에 들어가면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기도 하고, 악몽에 시달리다 잠을 깨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사고 당시를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고 괴로워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 하루 이틀도 아닌 밤마다 잠 못 잔다고 상상을 해 보라, 그 고통이 어떠한지. 사고를 당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시달리니 그 고통이 어떨지 상상을 해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대피해 할머니들이 기거하고 있는 집의 책임자였던 승려가 그 곳에서 일 하는 여성을 성폭력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여성계는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명백한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승직박탈’을 요구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불교 종단인 조계종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마지못해 겨우 ‘직위해제’ 하는 선에서 마무리는 아주 치사하기 그지없는 짓을 한 적이 있다. 여성운동을 하는 분을 통해 그 여성이 엄청난 수치감과 악몽 때문에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앓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민주노동당 내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 사람 재능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안타까운 사람인데’라며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한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인권이 그것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무슨 재능과 역량이 탁월하기에 사람보다 소중하단 말인가? 심지어 여성들 중에도 그런 시각에 젖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남성중심의 폭력적인 문화가 빚어낸 잘못된 것임에 분명하다. 자기 딸이 피해를 당해도 그런 말을 할지 물어 보고 싶다.

 

  모든 폭력이 그렇지만 특히 성폭력은 피해자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등 2차 피해를 겪는다. 이 점을 가해자들인 남성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들도 상당수가 모르고 지내는 게 우리 현실이다. 우리 민주노동당은 폭력에 대해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징계 수위도 매우 높다. 모든 것을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는 일반법과는 달리 가해자가 증명을 해야 하는 ‘피해자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 내 여성운동의 성과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성들의 불만이 있을지 모르나 자기 가족들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대부분 공감하리라 믿는다.

 

  흔히들 용서란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아는 사이인데 서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게 폭력 사건이 발생 했을 때 일반적인 수습 수순이다. 당장 봉합을 해 괜찮은 것 같으니 말끔히 정리를 하지 않고 넘어갔기에 불씨는 계속 남아있다. 우리 사회 내부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이 바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용서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피해를 당한 당사자고, 가족들이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리라 본다.


  화해를 하려면 용서가 있어야 하고, 용서는 가해자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인 피해자의 몫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해자가 용서를 빌 수는 있어도 거론하는 것은 시건방진 짓거리임에 분명하다. 내가 직접 겪지 않았다고 폭력 사건에 둔감한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은 폭력을 눈 감는 것이지만 ‘폭력에 간접적으로 가담한 것과 다름없다’면 지나친 과장일지 모르겠다. 내 상식으로는 ‘침묵은 폭력에 가담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더 나아가 우리는 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문제 해결을 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 밀양의 줄거리를 목회를 하는 선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거듭하다 신앙으로 자신을 추스른 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로 찾아 갔더니 살인자는 이미 ‘하느님이 용서를 했다’며 반성하거나 미안하다는 표정은커녕 기뻐 날뛰는 것을 보고 주인공인 전도연은 뚜껑이 열려 ‘이건 아냐’라며 절규했다. 큰 교회 예배에 갔더니 ‘원수를 용서하라’는 설교를 하기에 김추자의 노래인 ‘거짓말이야’를 틀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맞다,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요 권한이지 가해자는 근접할 영역이 아니다.


  폭력 사건을 보고도 나는 침묵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부끄럽게도 내 양심에 당당하지 못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폭력 앞에 결코 침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 피해자가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될 수도 있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이기에 침묵하지 않으려 한다. 예수의 직계 제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 문서를 먼저 기록한 바오로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맞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불의한 것을 그냥 묵과해서는 안 된다. 폭력 앞에 다른 이상한 토를 달지 말기를 거듭 부탁한다. 토를 다는 것은 2차 피해를 유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