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여름 마포의 한 사무실을 얻어 혼자 상근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 사무실은 국민승리21이 되었고,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를 거쳐 열 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민주노동당이 되었다(법원이 조승수의 의원직을 박탈하였지만,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여전히 ‘열 명의 국회의원’이라 굳게 믿는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을 우습게 보지만, 세계 정치사에서 민주노동당처럼 빨리 성장한 당은 없다. 유럽 진보정당들보다 훨씬 빠른 성장을 거듭하기도 하였거니와, 민주노동당에 당비 내는 당원 8만 명이 있음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백년 넘은 영국노동당의 당원이 20만 명이다. 더구나 그 당원의 상당수가 노동조합 집단 가입에 의한 것임에 비추어 개별 당원주의를 취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1만 원씩 당비 내는 당원 8만 명이라는 숫자는 가히 역사적인 것이다. 물론 수십, 수백만 명을 거느린 북조선노동당이나 중국공산당도 있지만, 당이 곧 국가인 그 당들과 민주노동당을 비교하는 것은 양 측 모두에 대한 모독이다. 민주노동당에 있어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당의 민주주의 제도다. 보수정당 뿐 아니라, ‘재야단체’니 ‘시민단체’니 일컬어지는 유사 진보세력에서조차 다수결과 선거 제도가 없던 시기에 민주노동당은 주요 당직과 모든 공직 후보자를 당원 직선으로 뽑는 선거제도를 과감히 도입했다. 민주노동당을 흉내낸 보수정당들이 이른바 ‘진성당원제’에서 ‘기간당원제’로 결국은 ‘국민경선제’로 후퇴한 오늘날 당직과 공직을 당원 직선으로 뽑는 정당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치세력에게 무엇이 가장 부족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시간’이라고 답한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 처음 나왔던 김대중이 그 자리에 오르는 데는 26년이 걸렸다. 지금의 집권여당에게는 한민당으로 부터 시작된 60년의 역사가 있다.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데는 전태일 분신으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치세력이 힘이 없어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긴 시간을 함께 인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자인하는 것일 뿐이다. 처음부터 신임당직자들에게 언젠가 민주노동당이 깨져야 한다고, 당은 분화 발전하는 것이라고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예전에 민주노동당에서 사무부총장을 지냈던 황이민은 대단히 전투적인 감성을 지닌 이인데, 내게 같이 공산당 만들자고 농담했었다. 요즘 들어서는 ‘88만 원 세대’를 쓴 우석훈이 나중에 나이 먹어 같이 공산당 만들자고 말한다.
황이민이나 우석훈의 계산보다는 좀 빠르지만, 이제 민주노동당을 떠날 때가 된 듯하다. 민주노동당이 빨리 성장하였으므로, 그 당 운동의 분화 발전 시기 역시 빨리 다가왔다. 물론 민주노동당 아닌 새 진보정당의 창당 시기가 내달이 될지, 내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진보정치운동의 흐름을 민주노동당에서 새 진보정당으로 트는 노력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많이 알려진 바대로 민주노동당을 넘는 새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첫 이유는 ‘주체사상파’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도입하여 정착시킨 다수결과 선거제도를 되돌리거나 유보하려 들어서는 안 되지만, 민주주의에 고유한 딜레마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딜레마가 민주노동당에서 나타나는 구체상이 바로 주체사상파다.
20년 노동운동한 노조 위원장이나 한총련 학생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고, 민주노동당 10년 역사 중 앞 절반의 시기에는 전자가 후자를 선도했지만, 뒷 절반에는 후자가 전자를 표로 압도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 독도에 공수부대 보내자는 당이 되었고, 당직자의 언행을 감시해 북한 정권에 넘기는 당이 되었고, ‘자주적 핵무장’에 열광하는 당이 되었다. 평소 점잖아 말을 아끼는 고려대학교 최장집 교수나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이나 ‘경향신문’ 이대근 에디터로부터 매몰찬 야유와 조롱을 받는 당이 되고 말았다. (연대신문/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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