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행복한 눈물’의 진짜 주인공을 찾다

녹색세상 2007. 12. 4. 01:45
 

찢긴 행복을 깁는 강정숙을 만나다

 

 

창신동에 바람난 사람들이 모였다. 바람도 은밀한 장소에서 숨어서 난 것이 아니다. 서울시내 한가운데서 났다. 바람난 현장에는 카메라가 쉼 없이 터진다. 누구도 얼굴을 손으로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손을 흔들거나 무릎을 살짝 굽히며 카메라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포즈를 취한다. 아니, 이런 바람난 현장이 있단 말인가?


언제 주인공이 된 적이 있는가? 목소리 한번 귀 기울여 준 적이 있는가?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 열 시간 이상을 미싱이라는 수갑을 찬 채 일을 했던 사람들. 집에서는 아내이자 엄마라는 족쇄에 묶여 한 번도 나를 위해 밥을 지어보지 못한 사람들. 단단히 바람이 났다. 웨딩드레스 말고는 자신의 옷은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바람난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손가락질이나 비난을 하지 않는다. 숱한 찬사와 박수소리만이 뒤덮였다.


바람난 여자들이 아름답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은 내 아내를 찾지 않았다. 내 엄마를 찾지 않았다. 여자를 찾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아내가 아닌 자랑스러운 ‘사람’을 보았고, 엄마가 아닌 세상의 멋진 주인공을 보고 있었다. 바람난 여자의 아름다움을 본다. 지난 11월 9일 수다공방 패션쇼이야기다. 적게는 2년 많게는 37년을 여성봉제노동자로 살아간 창신동 아줌마들의 바람난 현장이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자신이 모델이 되어, 무대에서 멋과 기술을 뽐낸 자리. ‘행복한 눈물’은 재벌가의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 아니라 이곳 패션쇼 장소에 있다.


장관님, 연기자, CEO, 가수들과 나란히 무대에 선 아줌마 모델은 눈이 부셔 절로 보는 이들의 눈을 젖게 한다. 고두심이 아름답다, 아시아나 승무원이 예쁘다며 말을 하는 이도 있다. 미안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거기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유선이나 위성방송에서 리모콘 단추만 누르면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거리를 나서거나 출퇴근 지하철만 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행복한 눈물’을 만든 비결은 옷의 디자인도 당당한 워킹도 우아한 연기도 아니다. 세상을 깁듯이 6,70년대 한국경제를 깁고, 말없이 가정과 가족을 깁은, 한땀 한땀 눈물로 기운 바느질의 땀 마디마디가 꽃피웠다. 창신동 여성봉제노동자들의 워킹이 없었다면 그날의 패션쇼는 여느 패션쇼보다 나을 것이 없다. 아니 보잘 것 없었을 거다. 창신동 여성봉제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패션쇼였다.


행복한 눈물의 주인공

 

 


누가 만들었을까? 어떻게 살아온 사람일까? 지금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일까?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을 찾아 나섰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패션쇼의 주인공 강정숙을 만났다. 그는 올해 수다공방의 최고기술자 상을 받았다. 상을 받은 게 의외라고 한다. 기술보다는 노력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겸손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20년을 미싱을 했지만 가방만 했어요. 가방은 뻣뻣하잖아요. 부들부들한 원단을 가지고 옷을 만드니 이렇게 노면 저렇게 실룩, 저렇게 노면 요리 실룩,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남들은 과제를 끝냈는데도 강정숙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짜증이 났다. 떼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오기가 불끈 솟았다. 그때부터 재킷을 혼자 만들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예쁜 눈으로 봐 준 것이죠. 하려고 하는 의욕에 점수를 주신 거예요. 오기가 옷 만드는 것을 배우게 했어요.”


지금 강정숙은 서대문자활센터의 재활용사업단에서 일을 한다. 헌옷 등을 모아 다시 리폼을 하거나 장바구니, 앞치마 같은 소품을 만들어 매장에서 판매하는 일이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다. 87년에 결혼을 해서 남편과 함께 가방공장을 했다. 십년 가까이를 정말 열심히 일했다. 살림도 차곡차곡 늘었다. 아파트에 입주할 날을 앞두고 있었다. 두 아들에 이어 세 번째 아들의 출산을 눈앞에 두었다. 이를 어쩌나?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릴 날이 코앞인 96년 8월 가방공장은 3억이 부도났다. 남편은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는데, 1년 만에 또다시 외환우기 한파에 무너지고 말았다.


행복을 찾아 나선 노점


주저앉지 않았다. 노점을 시작했다. 밤에는 국수를 팔고, 낮에는 계절에 맞춰 아이스크림이나 다른 것을 때에 맞춰 바꿔가며 팔았다. 장작을 패어 장작구이 통닭장사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새벽 여섯 시에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부치면 아들 학교 갈 시간. 밥을 지어 학교를 챙겨 보낸다. 다시 열시까지 잠깐 토막잠을 잔다. 낮 장사를 나간다.


남편은 어려서 다발성골수염을 앓아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다. 무거운 짐을 움직이거나 노점 이동의 몫은 강정숙이 해야 한다. 남편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낮 장사를 챙긴 준 뒤에 강정숙은 저녁 장사 준비를 한다. 새벽 여섯 시까지 밤을 도와 일을 한다. 일 년 삼백예순날을. 결국 쓰러졌다. 남편과 일을 했지만 서로의 건강을 배려할 짬이 없었다. 그렇게 3년. 강정숙은 멈춰야 했다. 그럴 만도 하지, 부도가 나고 곧바로 막내를 출산을 했다. 어디 산후조리나 제대로 했겠나? 빨리 어려움에서 헤어나고자 몸을 마구 썼으니 망가질 수밖에.

 

 


동사무소를 찾아가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혀를 내두른다. 신장ㆍ갑상선 할 것 없이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절망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무너졌다. 강정숙의 도움 없이는 남편은 혼자 노점을 할 수 없다. 3년 만에 희망을 나르던 노점도 접어야 했다. 남편이 가방공장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가방은 사양 산업이 되었다. 일을 해도 아이들 과자 값 줄 형편도 되지 못했다. 돈에 쪼들리고, 몸이 아프니, 정신마저 힘들어 우울증에 빠진다.


주저앉을 수 없어 찾은 곳이 동사무소다. 신랑도 나도 일을 하려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나마 일을 해도 아이들 과자 값도 되지 않으니 어떡하느냐고 호소했다. 동사무소에서 인연을 맺어 준 곳이 이곳 ‘서대문자활센터’다. 강정숙의 나이 마흔다섯.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자활센터에서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저 땅 밑에서 싹을 틔우다


강정숙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정부 지원의 최저생계비에 만족하며 머물지 않는다. 강정숙의 배움과 다시 일어서기의 열정은 올해 수다공방의 최고기술자 상을 받게 했다. 땅 밑에서 강정숙은 싹을 틔우고 있다. 어떤 편견으로 세상이 강정숙을 바라보더라도 꿈을 버리지 않는다. 무너지거나 물러서지도 않는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피어나는 질경이처럼 강정숙의 뿌리는 세상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밝은 햇살을 향하여 싹을 틔우고 있다. 두툼한 세상의 장벽에 금을 내며.


“아이들한테 이야기해요. 살다보면 진창도 가시밭길도 갈 수 있어. 그것 가지고 포기하고 자빠지지 마. 일어나서, 툭툭 털고 일어날 때 바른 삶을 살 수 있어. 네가 넘어졌을 때 손을 잡아줄 사람도 있지만 아무도 없을 수도 있어. 울고만 있을래.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해. 이게 살아가는 지혜야.”


강정숙 자신한테 하는 다짐이 아닐까. ‘울고만 있을래.’ 강정숙은 ‘행복한 눈물’을 흘릴 날까지 울지 않을 것이다. ‘툭툭 털고’ 가방을 기웠던 미싱 바늘로 행복을 깁는 재봉틀을 밟을 것이다. 밥은 있어도 반찬을 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동사무소에서 주는 식권으로 아이들은 끼니를 해결한다. 하지만 아직도 강정숙은 아이들의 ‘우상’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보았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최고 멋진 모델’로 패션쇼에서 워킹을 하던 강정숙을. (참세상/오도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