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 사건이 김용철 변호사가 예측한 각본대로 흘러가고 있다. 언론은 삼성 논리를 전하기 바쁘고, 검찰은 수사에 소극적이다. 김 변호사는 “임채진씨가 검찰총장이 되면 수사를 절대 못한다”라고 주장한다.
“나를 미친놈으로 몰고 나서, 검찰을 희생양으로 삼성은 꼬리 자르기를 할 것이다.” 지난 10월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 기자 회견이 있기 직전, 김용철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 현 전략기획실) 법무팀장은 삼성의 대응 전략을 이렇게 예측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2004년 불법 대선 자금 제공 혐의로 검찰에 출두한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왼쪽 두 번째). 이 부회장 뒤에 당시 김용철 법무팀장이 보인다.
당시 그가 예측한 시나리오는 대강 이러했다. “삼성이 우선 나를 정신병자로 몬다. 그런 다음에 우리 부부가 돈을 갈취하기 위해 폭로한다고 여론을 만든다. 다음은 검찰이나 다른 쪽으로 사건을 몰고 가서 폭탄을 터뜨린다. 폭탄은 검찰의 로비 리스트가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삼성이 시야에서 벗어나고,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운운하며 사건을 마무리한다. 언론이 여론을 만들고, 국가 기관이 삼성을 봐주면 된다. 1차 저지선은 삼성 계열사 사장이 책임진다. 구조본이 다치지 않는 게 지상 명제다. 이들이 총대를 메지 못하면 최종 저지선은 김인주ㆍ이학수 등이다.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전무를 사수하는 게 구조본의 절대 목표다.”
“X파일 사건, 삼성 각본대로 마무리”
김 변호사는 지난 대선자금 수사와 X파일 사건 등 중요 사안마다 삼성은 삼성의 계산대로 일을 마무리했다고 주장했다. 그 작업에 김 변호사도 참여했다고 한다. 2003년 대선 자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재벌 개혁이 화두로 떠올랐다. 결국 2월23일 최태원 SK 회장이 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 주변에는 삼성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SK의 자료를 검찰에 흘렸고,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제위기설을 증폭해 재벌 개혁을 희석한다는 시나리오가 돌아다녔다. 여기에 대해서 김 변호사는 “삼성이 수사 방향을 돌리거나 증거를 흘린 것은 아니지만 결국 삼성 시나리오대로 마무리됐다. 최태원 회장은 어려서 검찰에 로비하는 게 약했다”라고 말했다.
2005년 X파일 사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이 문제에 대해 삼성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삼성의 각본대로 완벽하게 정리했다”라고 말했다. X파일 사건이 터지기 직전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기자에게 “불법 도청으로 취득한 X파일은 문제 삼을 수 없다. 불법 도청을 한 국정원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국정원이 먼저 손을 들어 순순히 자신들이 불법 도청을 하고 다녔노라고 고백했다. 그러고는 수사의 칼날은 국정원에 집중됐다. 결국 이학수 실장이 검찰에 한 번 다녀오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1999년 X파일 사건과 관련해 김 변호사는 이학수 실장과 함께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 씨와 박인회 씨를 만났다. 김 변호사는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썼더니 이학수 부회장이 청와대에 보냈다”라고 말했다. 2005년 X파일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 대통령은 고비마다 삼성 편을 드는 발언을 해, 삼성의 구원투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1월5일 삼성 측은 사제단의 2차 기자회견 두 시간을 앞두고 삼성 직원과 삼성경제연구소 회원 등 각계 각층에 ‘김용철 변호사 주장에 대한 삼성의 입장’을 배포했다. 여기에서 삼성의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삼성은 김 변호사의 폭로 배경과 동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 김 변호사의 주장이 양심 고백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 탓이라는 것이 요지다. 삼성은 김 변호사가 삼성에서 100억원 이상 받았다는 점을 부각했다. 돈 문제가 국민의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박문에서 삼성은 김 변호사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기자들에게 김 변호사 전처가 회사 임원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해 김 변호사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았다. 삼성 주장이 다 옳다고 해도, 삼성이 정신적·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을 7년 동안 100억원 넘게 왜 돈을 줬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문제의 핵심인 비자금 계좌에 대한 소명은 거의 없었다. 민변의 이덕우 변호사는 “삼성의 해명은 사생활을 담고 있는데 이마저 사실과 다르다. 명예훼손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이 김 변호사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데 주력하는 것 같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해명을 위해 기자를 찾은 삼성 임원들은 “김 변호사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삼성 전략기획실의 다른 임원은 MBC <뉴스후> 팀에게 “김 변호사가 룸살롱 마담과 외도로 이혼했고, 그 마담과 혼인신고까지 했다”라며 험담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기자가 그 임원에게 진위를 묻자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지난해 8월 김 변호사는 심장 주변 부정맥 시술을 받았다. 이틀 만에 퇴원하는 간단한 시술이었다. 그런데 삼성 임원이 최근 이 병원을 찾아 심장 시술로 뇌 이상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사제단과 김 변호사는 검찰의 로비 리스트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며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삼성 비자금 문제가 검찰 로비로 희석되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자꾸 로비 리스트를 쫓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언론과 검찰 때문이다. 11월7일자 중앙일보 기사 제목이다. ‘명단 없으면 수사 공정성 담보 못해’ ‘참여연대·민변, 삼성 뇌물 공여 고발…검찰 떡값 검사 명단 내라’.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다. ‘떡값 명단 있나 없나’ ‘로비 검사 명단 안 밝히면 수사 어려워’ ‘김용철 변호사, 떡값 명단 있으면 밝혀라’는 사설을 내기도 했다.
검찰은 왜 자기 진영에 폭탄을 터뜨리려 할까?
검찰은 “떡값 검사 명단이 없으면 수사팀을 꾸릴 수 없다”라는 주장만 거듭하고 있다. 검찰의 이런 태도는 검찰 간부 상당수가 삼성의 로비 대상이라는 김 변호사의 주장을 간접 시인하는 셈이다. 검찰이 한사코 자기 진영에서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대목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 김용철 변호사는 “초법적인 권력 체계를 이어가기 위해 부정한 돈으로 사회를 오염시키는 삼성이 문제다. 자꾸만 검찰 리스트를 이슈로 부각하는 것은 삼성이 원하는 시나리오다”라고 말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의 카드를 읽으면 삼성이 반격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먼저 치고 나왔다. 업무상 알게 된 의뢰인의 비밀을 공개해선 안 된다는 윤리규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징계 절차에 착수하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잘못으로 범죄 조직에 가입한 변호사는 영원히 조직의 범죄를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의 예상대로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해 국가 기관은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우리은행과 굿모닝신한증권은 우리은행 조사를 보고 판단하겠다’고 했다. 재경부는 ‘삼성 비자금 차명 계좌에 대해 공개하지 못 한다’는 입장이다. 국세청은 ‘검찰의 조사 의뢰 없이는 차명 계좌를 조사할 수 없다’고 했다. 삼성 비자금 문제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위해 청와대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반론도 삼간 채 팔짱을 끼고 있다. 전 노사모 대표 일꾼 노혜경 씨는 “노 대통령은 검찰에 삼성그룹 수사를 지시해야 한다”라고 칼럼을 통해 주장했다. (시사 IN/주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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