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보고 많은 이들이 ‘죽을 용기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살지’라며 망자의 나약함을 나무랍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의 병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그런 병 생길 여유가 없다’는 말로 남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잔인한 짓을 아무런 생각없이 저지르기도 하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그런데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이었으면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으면 그들의 아픔에 조금도 다가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죽을 용기로 살아라’는 시건방진 소리를 마구 뱉어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로 자신의 몸조차 지탱하기 힘들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 산재 사고로 계속 치료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의 횡포로 종결이 되어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죽을 용기로 살아가야할 몸이 산산조각이 난 그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이젠 더 이상 할 자신이 없습니다.
투수의 어깨가 탈이 나면 아무런 쓸모가 없고, 배구 선수가 공을 너무 많이 쳐 손가락에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병에 걸리면 운동을 접어야 하듯 사고 후유증으로 팔이 아파 글자를 쓰지 못하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다면 팔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 이들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용기 잃지 마라’는 입에 발린 소리보다 재활치료를 해 100점은 아니라 할지라도 85점 정도의 몸은 ‘국가가 만들어 줘야 한다’고 믿습니다. 옆에 있는 이들이 할 일이라면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는 것’이지 훈수 두는 것은 시건방진 짓인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 자살률은 교통사고 사망자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입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책임지는 놈 하나 없으니 더욱 분통 터질 노릇이죠. 이것이야 말로 심각한 문제임에 분명합니다. 갈수록 급증하는 산재환자 자살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선천적인 장애인은 20% 이하고 대부분은 후천적인 장애, 즉 중도장애를 입었으니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봐야할 것 입니다.
혼자라면 깨끗이 가고 싶은데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고,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에게 ‘용기 잃지 마라’는 시건방진 소리는 접고 함께 아파할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하려 합니다. 이럴 때 평생 지병을 앓으면서 고통 속에서 살다간 ‘하나님 나라 확장운동’의 뛰어난 이론가요 실천가였던 바오로의 ‘오직 달려갈 뿐’이라는 고백을 떠 올려봅니다. 살아있음에 감사는 하겠지만 ‘죽을 용기 있거든 무슨 짓이라도 해서 살아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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