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이상범 충격 …… 배신 변절 행위 묵과한 원죄

녹색세상 2007. 8. 31. 20:02
 

그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배신 변절의 역사는 쇠심줄마냥 길고 질기다.


  “현재의 대선 구도 하에서는 민주노동당의 힘으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을 힘이 없다”며 이상범 전 울산 북구청장이 28일 민주신당 손학규 캠프에 합류했다. 이른바 배신 변절이다. 당원들은 민주노동당이 ‘보석’처럼 안고 있던 울산북구에서 민주노총 최대의 단위노조인 현대자동차노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구청장의 길에 들어선 이 전 구청장의 배신 변절의 진실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빛을 �아 갔다’는 것은 일반적인 평가다. 왜 민중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뒤로 하고 지금 갑자기 빛을 �게 됐냐는 것이다.


  당내에서 두 가지 설득력있는 견해가 나왔다. 첫째 이상범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 갈 사람이 갔다는 평가다. 둘째 그와 같은 우연분자가 당내에서 그만한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당과 진보진영이 방치했다는 것이다. 나는 전자에 동의하면서 본질을 후자에서 찾는다.


  그의 노동자 민중, 진보진영에 대한 배신 변절의 역사는 쇠심줄마냥 길고 질기다. 90년 4월 28일, 변절자 이상범은 당시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이었다.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현대자동차 야간조 노동자들의 새벽 4시부터의 총파업 가두투쟁이 주간조 노동자들의 합류로 수만 명의 총궐기로 번져갔다. 변절자 이상범은 조합원 총회에서 ‘파업중지’를 명하고 이어 조합원 총투표 의사를 무시하고 사측과 직권조인한 뒤 야반도주했다. 이후 정갑득 조합원(현 금속노조위원장) 등 핵심간부들이 대거 구속됐고 현장은 전투경찰에 의해 완전 장악됐다. 조합원들은 강제조업의 치욕을 맛봐야했다.


  현지 노동자들은 그것으로 그의 노동운동가로서의 정치생명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며칠 뒤 전투경찰이 지키고 있는 황폐한 현장에 유유히 복귀해 일주일간의 단식시늉 끝에 조합원 불신임투표를 자청하고 나서 재석 2/3인 66.7%에 불과 150표 모자른 부결로 위원장직 박탈을 모면했다. 수십 장의 뭉치표 등 당시 집행부에 의한 조직적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논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상범은 단죄되지 못했고 이후 유력한 노동운동 지도자로 다시 부상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의 첫 총선투쟁에서 울산 북구에서 최초의 노동자후보를 탄생시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진행되는 동안 변절자 이상범은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 최용규를 “500명도 안되는 중소기업노조 출신”이라고 깎아내리고 ‘00파 출신’이라는 악선전을 해대며 현대차 내부에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합원들에게 반 최용규 정서를 심어주고 일부는 노골적으로 윤두환 신한국당 후보를 지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북구의 작은 하청공장 노조위원장 출신인 최용규는 불과 600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민주노동당 첫 원내진출의 축배는 4년 뒤로 물려야했다. 그의 이런 반당행위는 이후 당내에서 공식기관을 통해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사람들은 이를 두고 후보 선출 과정에서 발생한 당내 갈등을 근거로 정파대결양상으로 묘사하기에 급급했다. 정파갈등 소동 속에 이상범은 그 죄를 추궁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위태로운 정치생명은 끈질기게 이어져 북구청장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북구청장 재임시절 2004년 북구 음식물자원화시설 건립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집단항의시위를 연일 벌이자 “업자의 책임 하에 공사가 진행되므로 공사방해가 계속된다면 업자가 직접 주민들에게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당원들을 포함하여 주민대표 2명을 구속시키고 23명에게 21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주민들이 항의의 표시로 자녀들을 등교시키지 않자 교육청은 이들 모두를 ‘무단결석’으로 처리했다. 주민들은 패배감에 빠졌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이후 변절자 이상범은 당기관지 <이론과 실천>에 기고한 글에서 이 사태를 ‘악성민원’이라고 분류하며 ‘자신이 주도한 시민배심원제를 오히려 민원해결의 성과라 자찬한다. 당시 56명의 배심원제 도입은 주민대표단이 구속된 이후 졸속으로 치러진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

 

  △ 중산동 음식물 자원화 시설 공사 차량을 막고있는 주민들과 대치 중인 경찰.


  변절자 이상범은 울산북구 음식물 자원화시설 사태로 어떠한 당의 제재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당의 각급 단위가 그를 옹호하고 칭송하기에 바빴다. 당 소속 진보정치연구소는 2005년에 발간한 「연구보고서 4」를 통해 “구청장의 환경친화적 음식물 자원화시설에 대한 의지와 함께 관행적 상의하달보다는 주민에 대한 끊임없는 설득과 협의의 틀 마련을 위한 적극적 태도가 돋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울산북구 주민은 민주노동당에 야유를 보냈고 서울의 중앙당은 이를 감지조차 하지 못했다. 2005년 조승수 의원이 이 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억울하다’고만 반복해온 민주노동당은 10.26 재보궐선거에서 정갑득 후보 유세지원과정에서 주민들에게 ‘뺨 맞으며’ 사건의 내막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이게 뭐냐?’고 당내 문의가 쇄도할 때 북구 주민들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북구청장 선거패배 등 연이어 민주노동당을 무섭게 심판했다.


  사건 2년 만인 지난 6월 11일 오전 11시 민주노동당 울산북구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음식물자원화시설로 인해 상처받은 중산동 주민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드린다”며 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공식사과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공식 사과 이후에도 변절자 이상범에 대한 당의 제재는 없었다. 이후 2개월 뒤인 8월 28일 변절자 이상범은 자신의 반노동자 반당적 행위에 대해 지나친 아량과 얼버무림으로 일관했던 당에 대해 작은 선물을 남긴다. “오래 전부터 고민하고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 탈당과 적진투항이다.


  누구나 결함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변절자 이상범은 무수히 많은 민중 배신행위를 해왔을 때마다 그에 맞는 적절한 비판을 받지 않았다. 이상범은 자신의 행각에 대해 뉘우침 없이 진보진영의 대표선수로 임해왔고 그의 지지자들과 정치적 성과의 수혜자들은 그에 대한 사소한 비판도 ‘정파갈등’으로 몰아세웠다. 결함이 있을 때 응당 조직은 비판을 줘야 한다. 비판이라는 주사바늘이 아프다고, 떼쓰는 아이를 보듬고 의사선생을 ‘음모’ 운운하며 삿대질하는 못난 엄마구실이 오늘날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다면 제2, 제3의 이상범은 계속 양산될 것이다. (신석진/진보정치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