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우리 아들은 노예가 아니다.

녹색세상 2007. 8. 11. 16:36
 

  입시공부에 시달리느라 깜깜한 터널 속 같은 시절을 지나서 어렵게 들어선 대학문턱. 대견했던 마음도 잠깐이고 아들은 나름대로 학점관리에 취직공부다 영어연수다 하면서 4년이 훌쩍 갔다. 그 사이 군대도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드디어 취직을 했다. 취직난이 극심한 시대에 그래도 이름을 알 만한 회사에 취직한 것이 뿌듯했다. 스무고개를 넘듯 수많은 관문을 통과에서 이제 당당히 사회로 들어서는구나. 한 몫을 해내는 사회인이 되었구나 하는 감회가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 취직한 후 아들이 집에서 저녁을 먹어 본 적은 주말을 빼놓고는 한 번도 없다. 통근시간이 4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직장에 가기 위해 아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에 출근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어쩌다 빨리 들어오면 밤 10시, 아니면 자정 가까이 퇴근해서 오기가 일쑤이고, 밤 12시를 넘겨서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부지기수다. 때로는 노트북을 가져와서 새벽에도 일어나서 일을 하는가 하면 주말에는 집으로 노트북 가져오는 것은 물론 한나절씩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고 오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니 아들은 집에서 잠자는 것 외에 다른 사생활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밤늦게 피곤한 몸으로 들어와서 씻고 잠자고 아침이면 일어나서 허겁지겁 아침 먹고 출근하는 것이 전부이다. 사실 주중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잠자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는 밀린 잠을 보충하느라 시간이 간다. 이런 아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기가 막혔다. 이러려고 아이를 키웠나. 이러려고 아이가 힘들게 입시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왔나. 세상 어느 집에서나 아이란 보배같이 귀하고 부모의 희망이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오니 노예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는 혹시 우리 아들이 일에 서툴러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인지, 다른 회사원들은 몇 시쯤 귀가하는지 궁금해서 주위의 친지들에게 물어봤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다른 집의 자녀들도 모두 밤늦게 퇴근해서 집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늦게 들어오는 것을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들이 그토록 밤늦게까지, 그리고 심지어 집에서까지, 또는 주말에도 일한다고 해서 시간 외 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관행이라고 한다. 회사 측이 만일 정상 월급보다도 더 비싼 시간 외 수당을 주어야 한다면 어떤 회사도 그렇게 사원에게 장시간 일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보릿고개를 넘던 60년대도 아니고 경제개발에 내몰리던 70년대도 아니다. 한국이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고 자랑하는 21세기다. 그런데도 회사 경영자들의 마인드는 그들이 초년병시절이던 한 세대 전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 근무조건은 오히려 혹독해져간다. 세계 11위가 아니라 세계 1위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국민들이 이처럼 노예같이 살아야 한다면.

 

  우리 아들은 아직 미혼이지만 조만간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속으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아내와 함께, 혹은 장차 태어날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나 있을 것인지, 집안일은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요즈음은 여자도 직장을 갖고 맞벌이하는 세상이다. 남자도 집안일을 얼마쯤은 도와야 할 텐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다.

 

  얼마 전 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오후 6시, 내가 머물렀던 동네의 공원을 산책하는 도중 가족과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거나 혹은 혼자서 죠깅을 하는 젊은이들과 마주쳤다. 얼굴에 깃든 나이로 보아 대학생은 아닌 것 같으니 직장인들일 터였다. 나는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그들을 한없이 쳐다봤다.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될 것인가. 나는 정말이지 온 세상에 외치고 싶다. 우리 아들은 노예가 아니니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 (프레시안독자 김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