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를 쏘다’ (한익수/미국동부위원회)
먹구름이 비구름이 되어 다시 찾아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나 비슷하다. 당시와 오늘은 자연의 현상마저 닮아 있다. 황사를 동반한 장대비가 밤새 퍼부었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그날과 2007년 4월 2일 한미 FTA 협상 타결을 선언한 그날. 비바람을 맞으며 피울음을 터뜨렸던 125년 전과 오늘의 민중은 이 두 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체제 10년 후, 한미 FTA가 추진되는 과정은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고, 6년 후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화 과정 속에서 몸통을 통째로 먹히는 역사의 악순환이다. 통상은 물론 세상에 대해 깜깜했던 조선이 맺은 ‘조일수호조규’는 당시 조선사회에 1997년의 외환위기(IMF대란)와 같은 일대 충격을 몰고 왔다. 영국, 미국의 상품을 잔뜩 지고 들어오는 일본의 보따리 장사치들과 고리 대금업자들의 물결에 넋을 잃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고종과 당시의 통상 개화론자들은 오늘날 한국의 ‘신자유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무모하고 초조했다. 미국과 빨리 손을 잡는 ‘연미’에 조선의 살길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는 ‘이이제이’식 발상을 하며, ‘균세론’을 신봉했다. ‘균세론’의 토대가 되는 번역서 '만국공법'과 중국 관리 황준헌이 ‘연미론’을 담아 쓴 ‘조선책략’, 이 두 책자는 이들의 필독서였다. 오늘로 치자면, 한미 FTA를 통해 '한미경제동맹'을 추진하고, 중국, 일본, 유럽연합 등과도 FTA를 체결, ‘동북아 허브’, ‘동북아 균형자’로 발돋움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욕망과 같다.
1880년 미국 해군성과 국무부는 슈펠트 미 해군제독에게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명한다. 미국이 걸핏하면 군대를 동원해 밀어붙이는 짓은 예나지금이 변함이 없다. 슈펠트 미국 측 전권대표가 직접 협상을 한 상대는 엉뚱하게도 중국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이었다. 조약의 초안은 청나라와 미국 간에 만들어졌다. 조선은 중국을 방문, 이홍장에게 귀동냥으로 협상의 내용과 진전을 간신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조선 내에서는 조약 추진 자체가 비밀에 부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한미FTA협상 체결 방식과 너무나 흡사하다.
미국의 반대로 비록 조약에는 포함이 안 됐지만, 청나라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문구를 넣자고 해도, 조선은 ‘좋다’고 했다. 치외법권, 조차지 설정, 최혜국 대우라는 주권 침해조항에 대해서도 조선은 “좋다”였다. 어리석게도 조선과 미국 간의 일반 관세율이 10% 이내로 된 것에 대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관세 자주권을 날려 먹은 조일수호조규의 무관세 조항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라고 자위했다. 당시 국제 통상 관례는 30-40% 관세 부과였다. 미국은 유럽과의 교역에서 40-50%의 관세를 부과하던 시절이다.
지금의 한미FTA처럼, 당시의 미국 의회는 양국 조약문에 추가 문구를 삽입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이를 관철시킨 뒤 비준이 이루어졌다. 역사에 의하면, 고종은 초대 미국 공사인 푸트가 조약비준서를 들고 조선에 도착한 날, 기쁨에 못 이겨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 직후, 조선은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 잇따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조선의 신세가 허브나 균형자가 아니라, 열강들의 노리개, 먹잇감으로 전락한 역사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국사책에도 잘 나와 있지 않은가?
당시 미국은 참 많이도 챙겨갔다. 공공 기간산업인 전화, 전기, 전차, 수도와 철도부설, 목재 채벌 등의 이권사업을 거머쥐었다. 황금알을 낳는 ‘노다지’인 금은 광산개발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학교와 병원사업에도 손을 댔다. 어디 그뿐인가! 관리도 미국인을 쓰는 ‘미친’ 세상이 찾아 왔다. 고종과 정부 부처의 고문들로 미국인이 들어앉았다. 왕실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은 시위대, 요즈음의 청와대 경호실이라 할까, 이곳의 책임자나 훈련 교관도 미국인이 맡았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직후 한동안 고종의 침소 옆에서 선교사들이 총을 차고 불침번을 섰던 일도 있었으니! 1895년 11월 춘생문 사건의 밤, 고종은 조선의 대신들을 물리치고, 선교사의 팔베개 속에 안도의 새벽잠을 주무신다. 노무현의 하는 짓이 이와 뭣이 다른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10년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은 제일 먼저 공관을 철수, 조선과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한다. 하지만 조선에 남아 있던 미국인 선교사, 장사치들은 별 탈 없이 1930년대 말까지 조선에 체류한다. 이들은 종종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연회에 참석,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한 축배를 든다. 조선의 점령 통치는 일본이 맡고, 조선의 ‘계몽교화’는 미국이 맡는 정교분리의 역할분담이었다. 이 같은 미일간 밀월의 조선지배 동맹관계는 제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이어진다. (세계 2차대전은 제국주의간의 이해 충돌에서 벌어진 것이지 나쁜 일본이 착한 미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조선의 지배세력은 크게 세 패로 갈려서 분탕 싸움질을 벌였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파, 자본주의제도를 확립하고 문호를 전면 개방하자는 개화파, 그리고 재야 유림을 중심으로 한 봉건체제 고수의 위정척사파이다. 나라와 민족, 민중의 운명이 갈림길에 섰던 그 옛날, 민중은 무엇을 했을까?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양척왜’ 그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던 선교사들 중 감리교 쪽인 알렌은 미공사관 직원이었고, 연세대에서 지금도 하느님보다 더 떠받드는 언더우드는 하와이 노동인력 송출을 독점한 ‘인신매매범’이었다. 무장투쟁을 반대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언더우드의 하는 꼴이 하도 마음에 안 들어 주먹을 날려 꼬뼈가 부러진 일도 있었다니 그들은 ‘복음’을 전하러 온 자들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첨병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착해서 학교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학교 장사를 위해 했고, 병원을 지어 의료장사를 했다. 선교사란 자들 때문에 저비용 고효율의 우리 전통의학이 말살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 차려야 할 대목이다. (끝 부분에 일부 사족을 달았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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