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국제

살바도르 아옌데, 잊을 수 없는 사람

녹색세상 2007. 4. 11. 00:44

  

우리에게 1980년 5월 18일은, 해마다 돌아오는 5월 18일을 특별한 하루로 느끼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반대쪽에 살고 있는 칠레인들에게 우리와 비슷한 1973년 9월 11일이 있다. 이 날은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쿠데타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미국 CIA가 배후 조종한 군부 쿠데타에 의해 칠레의 민주주의는 무참히 짓밟혔으며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30여 년 전 그날로 가보자. 

   

▲ 경호원들과 같이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

1973년 9월 11일 산티아고

 

이 날 칠레의 하늘은 잔뜩 찌푸린 을씨년스러운 아침 하늘을 열어보였다. 칠레 시민들은 아침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며 산발적으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파블로 네루다도, 가수 빅토르 하라와 그의 아내 조안 하라(Joan Jara)도 여느 시민들과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라디오 방송에서는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해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칠레에서는 반란의 공기가 여기저기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게다가 불과 며칠 전에는 불발 쿠데타가 진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9월 10일 밤 칠레 해군과 미국의 전함은 공동작전을 위해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고, 미국은 오래전부터 선거로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9월 11일, 이 날은 신임투표계획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옌데는 4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재신임투표에서도 그의 승리는 거의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의 육ㆍ해ㆍ공군과 경찰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들은 군사평의회를 만들고 의장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육군 최고사령관을 선출했다. 군의 이런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아옌데는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쿠데타 여부에 대해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려놓았다. 장관의 보고를 확인한 후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궁으로 향했다.


그곳의 인디펜던스홀(독립홀)은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칠레의 독립선언서가 소장되어 있는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장소로, 아옌데는 7시 30분 경호원들과 함께 모네다궁에 들어갔다. 그 시간, 쿠데타에 참가한 부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쿠데타군은 칠레의 여러 방송국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살바도르 아엔데 대통령은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저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적어도 저에 대한 기억은 이 나라에 온 몸을 바쳤던 사람. 제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불의한 무리들에게 제가 그냥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칠레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며, 우리나라의 운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새로운 길이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희생을 충분히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저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떠한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갑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방송직후 대통령궁은 군 병력, 장갑차, 탱크 등에 완전 포위되었고, 공중에는 칠레 공군 소속의 전폭기들이 선회 비행을 하며 ‘투항하라’는 선무 방송을 하고 있었다. 피노체트를 포함한 군부에서는 아옌데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해외 망명을 승낙할 테니 항복하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옌데 대통령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지만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옌데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킬 계획이었다.


9월 11일 10시 40분, 아옌데 대통령은 “훗날을 기약하려면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경호원들의 말에 “난 칠레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야. 절대 쿠데타군에게 항복할 수 없어”라며 대통령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했으나 일부만 대통령의 부인과 두 딸을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들을 데리고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의 공군 전폭기에서 폭탄이 투하되었다. 공군 전투기의 폭격 이후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모네다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쿠데타군이 모네다궁에 진입하고 얼마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의 팔라시오스 장군은 군사평의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투항을 종용하는 쿠데타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살바도르 아옌데는 특수부대 장교가 쏜 총에 최후를 맞이했으며 남아 있던 경호원들도 최후를 함께 했다. 그러나 군사평의회는 아옌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이후 새로운 칠레에서는 단 일주일여의 기간 동안 3만여 명의 시민이 죽었다.


새로운 인간, 살바도르 아옌데의 생애


1908년 7월 26일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출생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는 칠레대학교 의학부 재학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 정치운동에 참가했다. 아옌데의 집안은 19세기부터 이름난 정치적 활동가의 집안이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14살 때부터 집 주변의 구두수선공이었던 무정부주의자 후안데르마치(Juan Dermach)를 통해 바쿠닌의 저작 등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은 1926년 군대를 마치고 의대에 입학한 뒤 더욱 깊어졌다. 그는 빈민들의 질병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민중의 육신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정신을 치유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학창 시절에 이미 학생회장에 당선되는 등 지도자적 자질을 보였던 그는 반정부활동으로 투옥되었으나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가출옥하면서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사회투쟁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1932년 칠레 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22년부터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정당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소신이었다. 그는 1937년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그 후 1938년부터 42년 사이에 보건장관을 지내고,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의장과 부의장을 지냈다.


그리고 1952년, 1958년, 1964년 연이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진보진영의 분열과 미국의 반대공작 등으로 인해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공산당 대통령 후보 반려 등 진보진영의 후보 단일화에 의해 그는 ‘인민연합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당선된다. 그의 당선은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 출범이란 의의를 갖는다.


아옌데의 개혁정책과 미국의 이익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무렵의 칠레는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1970년 11월 5일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빵과 포도주로 가득 찬’ 풍요와 정의의 조국을 건설했다고 약속했으나 칠레의 정치 경제적 현실은 그의 약속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30대 다국적 기업 가운데 24개가 칠레에 진출해 있었고, 은행을 제외한 18대 칠레 기업이 미국의 자회사였다.


1818년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칠레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계급 간, 좌우파간의 갈등이 골이 매우 깊었다. 미국은 이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군인들과 카리요오 출신의 상류 계급 학생들을 자국의 웨스트포인트나 명문대학에 유학할 수 있도록 했고, 그들은 고국에 돌아와 새로운 지도층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전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부터 왜곡되기 시작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구조는 미국과 기득권 세력의 이윤추구를 위해 더욱 왜곡되어 일명 ‘바나나공화국(Republic of Banana)’이란 명칭으로 불릴 지경이 되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왜곡된 경제 구조를 바로 잡고, 계급간의 심화된 갈등구조를 치유하기 위해 미국이 중심이 된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던 탄광, 구리광산을 국유화하고, 노조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개혁을 시도했다.


이런 그의 개혁 정책은 칠레의 구리광산을 비롯한 여러 산업 분야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던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웃 카리브해 국가인 쿠바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미국의 심기를 잔뜩 건드려 논 상태였으므로 칠레에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부의 등장은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헨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국가안보회의에서는 칠레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논의했는데 두 가지 공작이 추진되었다.


하나는 칠레 경제를 도탄에 빠뜨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부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구리의 국제시장 교란을 목적으로 미국 내에 비축하고 있던 구리를 국제시장에 내놓았고, 그 결과 국제시장에서 구리의 가격은 15.7%나 하락하고 만다. 또한 8백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 결과 발생한 일이 1973년 9월 11일의 군부 쿠데타였다.


미국은 이에 앞서 철저한 사전준비 작업을 거쳤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천명한 당시 칠레 육군참모총장 레네 슈네이데르(Rene Schneider)같은 군인과 사회지도층을 납치, 암살하고, 칠레에 대한 대외차관을 봉쇄하였으며, 칠레에 수출되어야 할 각종 산업장비, 의약품 등 중요 기간물자의 수출을 중지시킴으로써 고사시키려 들었다. 그 결과 칠레는 1973년 상반기에만 300%에 이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맞게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 칠레 국내에서도 기득권을 빼앗기게 될 자본가들에 의해 유도 파업을 일으키게 하거나, 트럭업자들이 스스로 운행을 중단함으로써 물자운송을 지연시키는 등 전국적으로 자본가, 지주 등에 의한 태업(사보타지)이 일어났다. 또한 야당은 사사건건 대통령의 발목을 잡으며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이런 가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칠레의 민중들은 아옌데 대통령을 믿었고, 1973년 3월 의회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은 과반 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은 아옌데의 개혁은 추진력을 얻었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기 전에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던 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모든 민중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꿈을 꾼 것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탈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대로 칠레는 다시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아옌데의 개혁정책이 실패한 이유


그는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를 통해서는 승리자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나라, 동서로 길게 이어진 태평양 연안 국가에서 이미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아옌데는 오늘날까지 우리 주변의 뉴스를 장식하고는 한다. 바로 쿠데타의 주범이었던 피노체트가 해외뉴스의 한 토막을 차지하곤 하기 때문이다. 한때 칠레의 최고 권력자에서 이제는 면책특권이라는 실낱같은 면죄부 한 장으로 간신히 투옥을 모면하고 있는 피노체트. 그는 제 명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히 그를 죄인으로 기록할 것이다.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그가 1998년 스페인의 발타자르 가르손 판사의 요구에 의해 영국에서 구속된 사유는 반인륜적 범죄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칠레의 권력 수반에 있는 동안 미국과 그 외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과 공모하여 반체제 인사, 진보진영 인사들을 납치, 구금, 살해, 암매장하는 일명 콘도르 작전이란 것을 수행하였다.


 그로 인해 지난 73년부터 83년까지 군사통치 기간 중에 벌어진 400여 명의 스페인인 피살ㆍ실종사건 가운데 구체적 증거가 수집된 80여 건과 이른 바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으로 불리는 좌익 진압 작전, 특히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군사정권이 똘똘 뭉쳐 좌파 때려잡기 작전으로 공동 수행한 콘도르 작전은 칠레를 오가며 군사 정권을 비판하던 무수한 유럽인들이 이 악명 높은 콘도르 작전으로 희생됐기 때문이다.


한편 피노체트는 영국의 보수정치인들-이중에는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며 영국에서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주도한 마거릿 대처도 포함되어 있다-의 열렬한 구명 로비에 힘입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칠레로 무사 귀국했으며 그는 귀국과 동시에 앉아서 꼼짝 못하던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연출했다. 정부의 자제 명령에도 불구하고 칠레 군악대와 고급 관료, 장성들이 공항까지 그를 영접나간 것은 칠레 민주화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직도 험난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피노체트는 박정희를 몹시 존경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공식적으로 조기를 게양하는 문제를 검토할 정도로 말이다. 박정희는 역시 세계적 지도자(?)인 모양이다. “오늘 군이 봉기한 이유는 이 혼란에서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뿐이다. 조국은 혼란 속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맑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했다. 혁명위원회는 사법권과 언론 통제권을 갖게 되며 다음 조치가 있을 때까지 국회는 휴회한다. 이상” 이 말은 군사평의회가 쿠데타 직후 발표한 포고문이다.


어떤 가? 이만하면 5.16 쿠데타의 포고문을 그대로 표절했다고 말해도 좋지 않은가? 물론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과 노태우가 피노체트의 권력이양 및 사면에 대한 비법을 표절하기는 했지만.) 1959년 쿠바혁명의 성공은 아옌데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동시에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혁명 이후 최초로 쿠바에 날아간 외국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만났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에 카스트로를 칠레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는 “단결한 민중,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인식하는 민중은 반드시 승리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이 책임감 있는 지도자들을 가지게 될 때 민중의 승리는 더욱 확연해진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칠레에서 쿠바식의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 역시 아옌데의 이런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게바라는 자신의 저서 ‘게릴라전’을 “다른 방법을 통해 같은 결과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동지애를 가지고”라는 증정사를 적어 선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옌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체 게바라 역시 아옌데가 죽기 전에 이미 볼리비아 산중에서 살해당하고 말지만..... 그의 개혁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그가 혁명을 하지 못하고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비록 아옌데와 좌파인민연합이 의회선거에서 승리하였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경제력은 여전히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의회에서 새로운 개혁 정책을 준비하고 추진하는 동안 그들은 외화를 해외로 반출했다.


그로 인해 실업률을 높여 파업을 유도하거나 상품의 매점매석을 추진하는 등 개혁을 저지하거나 늦출 수 있는 여러 행동을 취해 유통망을 마비 시켰다. 그리고 그 책임을 오히려 사회주의 정부에게 돌렸다. 실제로 칠레에서는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기업주들의 파업으로 전 산업 부문의 조업이 두 번씩이나 중단되었고, 한편으로는 투기 때문에 물가가 엄청난 수준으로 폭등했으며, 상업 자본가들의 매점매석으로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한 줄서기 소동이 벌어졌다.


둘째,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지켜줄 수 없는 국가기구의 문제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쿠데타 세력의 전면에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들 국가기구들은 절대 중립적인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국가기구들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만약 이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이라면 어떤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그 정부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이들 국가기구를 동원해 반사회적 행위를 일삼는 기득권 세력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과 군대, 행정공무원을 비롯한 국가기구는 이미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기득권 세력의 일원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거나 움직이는 시늉만 할 뿐이다. 물론 이들 국가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들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잘 짜인 계급체제에 의한 것들로 상명하달의 원칙에 충실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원칙상 군대나 경찰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 수반과 국회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이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 아닌 관료화된 직업군인들이다. 여기에서 군대를 비롯한 물리적 폭력을 지닌 집단은 국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대개가 지배층으로부터 태어나고 훈련된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칠레에서는 3년 동안 정부의 명령을 사보타지(태업)하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아옌데 정부를 타도해 버렸다. 그 주체는 칠레의 장성, 법관, 고급 공무원들이었다. 실제로 아옌데 정부가 민중이 부여한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수호하고자 했을 때 움직일 수 있는 국가기구는 전혀 없었다.


셋째,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이 맞닥뜨린 또 다른 문제는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급진좌파 세력을 적절히 통제할 수 없었다. 이유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거기에 미국의 방해공작은 극심해 경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민중은 투쟁을 통해 실제로 사회가 변화하기 시작해야 자신들이 사회를 이끌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이럴 경우 경찰을 포함한 국가기구와 기득권 세력은 합법적 통제력을 구사하고자 움직일 것이다. 정부가 요구하는 정도 이상의 가혹한 물리력을 수반한 채. 정부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통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탄압할 수도 없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아옌데 정부는 준비했던 각종 개혁 정책을 그나마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아옌데의 이런 실험은 당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물론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함께 꾸었던 꿈이자 환상이었다. 그리고 모든 민중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꿈을 꾼 것에 대한 처벌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대로 칠레는 다시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는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를 통해서는 승리자로 기억될 것이다. (블로로그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