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입으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펴지만 실제 생활은 전형적인 소시민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난다. 진보적 지식인들 중에서도 그런 이가 없지 않아 비판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조직 노동자들의 의식과 일상은 어떤가? 조직노동자들의 일상 속에서 노동자의식은 살아 숨 쉬고 있을까?
가령 ‘단결’과 ‘투쟁’이 적힌 조끼를 입었을 때의 노동자와 일상생활 속에서의 노동자는 똑같은 의식을 가진 한 사람인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흔히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의식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부족한 노동자의식조차 대부분의 경우 일회성이거나 의식적인 것이다. 그래서 노조 행사 때나 단체협상 투쟁 때 <철의 노동자>를 함께 부를 때에나 발현될 뿐, 각자의 일상생활에서는 살아 있지 않다. 아니 살아있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반 노동자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돼!”라고 말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간단히 부정한다.
자식이 <철의 노동자>가 아닌 기름진 소시민이 되기를 바라면서 힘겹게 번 봉급과 수당으로 과외를 시키고, 친기업적인 신문을 구독하고, 노조간부들도 명절을 맞아 귀향할 때 무의식으로라도 ‘단결’ ‘투쟁’이 적힌 조끼를 입는 경우는 없는 반면에 삼성 제품은 아무런 생각 없이 사들인다. 삼성의 전근대적인 무노조 경영원칙이 21세기에도 관철되고 지금 이 시각에도 김성환 삼성 일반노동조합위원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오로지 창업자의 유훈을 지키려는 삼성 경영진의 집요함과 이 땅을 강고히 지배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이데올로기 때문일까? 그런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와 함께 조직노동자들조차 일상생활에서는 노동자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반 노동자적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귀족이 귀족으로서 의무를 지킨다”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하는데, 인류사는 노블레스(귀족)가 스스로 오블리주(의무를 지킨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귀족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무를 지워 왔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삼성의 무노조 원칙이 관철되는 것을 거꾸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그것을 허용하는 만큼 한국 노동자들의 일상에서의 의식이 낮은 데 머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 노조나 조직노동자 중 얼마나 삼성 무노조 원칙에 반대하려면 적어도 삼성제품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을까?
결국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유럽의 교실과 달라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 노동의 가치에 관해서 익힌 적이 없다. 중학교 교실에서 노동3권을 배우고 모의 노사협의를 해본 적이 없고, 고등학교 교실에서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토론한 적이 없다. 대중매체에 민중적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화과정을 통해 반민중적이며 반노동자적인 의식만 형성했을 뿐이다. 노동자로서의 자기를 부정하는 의식을 가졌으니, 늠름한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학습하고 또 학습해야 하는 이유다. 나 자신부터 재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학습을 조직하고 노동대학을 만들고 찾아 나서자. (홍세화/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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