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유세 폐지를 앞둔 스웨덴, 전망은?
복지국가 스웨덴의 상징 중 하나인 ‘부유세’가 곧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우파 연립정권을 이끄는 프레드릭 라엔펠트 스웨덴 수상은 지난 28일 “(4월 16일로 예정된) 춘계 예산안 심의 때 부유세 폐지를 제안해 올해 안에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제안이 야당과 노동조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통과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복지국가의 우회전이 시작됐다.
그런데 스웨덴의 우회전은 나라 밖에서 더 큰 환영을 받았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부자에게 많은 세금을 거둬 유지하는 복지국가 모델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시장 경쟁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식 모델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다”며 반기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런 들뜬 목소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불분명하다. 스웨덴 정부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강력한 복지 국가 모델에 대한 스웨덴 인들의 자부심을 대체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 한다면 그래서 별 효과 없이 자부심만 버렸다는 평가가 나올 경우, 스웨덴의 새로운 시도는 오히려 미국식 모델에 편승한 복지체제의 섣부른 훼손이 낳은 실패 사례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런 조심스러운 반응은 스웨덴 사회를 직접 경험한 이들에게서 주로 나온다.
“최소의 복지는 누구에게나, 높은 혜택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몇 년 전 교환학생 신분으로 스웨덴에 머문 적이 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인’의 눈에 비춰 봤을 때, 낯설고 놀라운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필자가 살던 아파트 아래층에는 헬레나라는 동갑내기 장애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말(馬)에 관한 책을 정독하는 이지적인 여성이었으나, 유난히 허약할 뿐더러 우울한 기질로 인해 오래도록 집중하지 못하는 증상이 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우선 궁금했던 점은 한국에서라면 그가 과연 ‘장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 하는 것.
당시 그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시(市)가 지원한 소형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각종 사회복지 수당 덕택에 다소 곤궁하지만 어느 정도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사회복지사가 자주 들러 그의 친구가 돼주기도 했고, 금전 지출이나 건강 문제를 친절하게 상담해주었다. 한편 대학 직원이었던 셸이라는 스웨덴 친구는 부지런히 일해서 평균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실업자가 되더라도 실업수당을 비롯한 국가지원이 곧바로 실시되는 스웨덴에서 왜 열심히 일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볕이 인색한 스웨덴을 떠나서 매년 여름마다 까나리아 제도에서 푸짐하게 햇볕을 쐬고, 은퇴 후 풍족한 연금을 수령하면서 은퇴 전 생활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려면 최대한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이처럼 스웨덴은 최소치의 행복추구권을 복지제도를 통해 인정해주면서도, 권리와 의무를 차등화하면서 복지의 질을 차별화하는 형식으로 수동적인 복지의 수혜자가 늘지 않기를 꾀하고 있었다.
복지는 ‘그저 먹는 것’ 아닌 당연한 권리…세금 많이 내고, 감시도 철저히
‘국제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그다지 심각해보이지 않은 사건들이 스웨덴에서는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경우가 잦았다. 동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늑장대응을 했다는 지적이 줄기차게 꼬투리가 되어서 외무부 장관이 경질되기도 했고, 당시 수상이었던 사민당의 요란 페르손(G?ran Persson)은 외국순방을 할 때 쓸데없이 가족과 동행했다는 소식이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의혹과 질타를 받았다. 스웨덴 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만큼, 자신들이 과감히 납부한 세금이 낭비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남다른 듯했다.
복지제도를 일컬어 “그저 먹으려는 심리를 부추긴”고 여기는 미국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복지를 지극히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듯했다. 스웨덴에서 만난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 복지국가에서 태어난 은혜를 감지덕지하게 여기는 이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장구한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속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평등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자부심은, 스웨덴 시민사회 속에 원체험처럼 스며든 듯했다.
“세금 때문에 외국으로 나간다”는 부자들의 으름장
그러나 최근 우파 연립정권이 집권에 성공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스웨덴에서조차 실업률을 낮추면서 기업 경영을 지원하겠다는 명분 하에 복지가 훼손될 위기에 부딪혔다. 스웨덴의 유력 일간지 <다겐스 니헤떼르>(Dagens Nyheter)는 최근 “스웨덴 의회가 이르면 올 가을부터 부유세 폐지 조항이 담긴 법안을 처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번에 의회에 상정된 법안은 1947년 도입된 부유세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스웨덴의 국부 유출을 막겠다는 성격이 강하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빼앗는 데 성공한 온건당 소속 프레드릭 라엔펠트(Fredrik Reinfeldt) 수상은 가장 대표적인 복지천국으로 알려진 스웨덴의 복지체계를 바꾸겠다고 선포했다. 이번에 상정된 법안 역시 당시 발표한 방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현재 스웨덴의 인구 가운데 2.5%인 225,000여 명이 부유세를 내고 있다. 하지만 직접세 성격이 강한 부유세 납부를 꺼리는 몇몇 스웨덴 인들은 부자에게 세금 징수가 관대한 국가로 이민을 가거나, 법인을 외국으로 옮기는 형식으로 합법적인 '세테크'를 해 왔다.
중저가 의류업체인 H&M의 경우를 보자. H&M은 세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외국으로 회사를 옮기겠다며 끊임없이 의회에 으름장을 놓았었다. 지난해 연정을 통해 집권한 우파 정권에게 세금 회피를 위해 외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려는 스웨덴 유력 기업들의 움직임은 대단히 걱정스럽게 비쳤다. 그만큼 스웨덴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 훤하기 때문이다.
라인펠트 수상은 중도당 소속 마우드 울루프손(Maud Olofsson), 자유당 소속 라슈 레욘보리(Lars Leijonborg), 기독민주당 소속 요란 해굴룬드(G?ran H?gglund)와의 연대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이렇게 구성된 우파 연정은 “형평성 증대를 위한 스웨덴의 오랜 노력을 '재고'하겠다”는 방침을 취했다. 일종의 거대한 유턴(U-turn) 움직임인 셈이다.
“부자의 세금을 줄이려 빈민의 주머니를 착취한다”
이번에 의회에 상정한 법안에 대해 현 스웨덴 무역부 장관 안더스 보리(Anders Borg)는 “전 지구화된 국제무역 경쟁체제에서 스웨덴이 낙오하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오늘날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불과 5개국만이 부유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 5개국은 스웨덴을 비롯해 노르웨이,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등이다. 그런데 이들 국가 중 가장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이 부유세 정책을 폐기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실제로 올해 가을 스웨덴 의회에서 부유세가 공식적으로 폐기되리라는 것은 이제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스웨덴의 전통적인 사회복지제도가 상당 부분 축소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예컨대 실업보험의 축소, 노동조합기금과 보살핌 노동에 대한 지원 삭감 등이 뒤따르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부유세를 내지 않던 나머지 계층에게 더욱 세금이 높아지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우려들 때문에 부유세 폐지 법안을 비판하는 야당인 사회민주당과, 전통적으로 사민당과 연대해 온 스웨덴노동조합총연맹(LO)은 이번에 상정된 부유세 폐지 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들은 “부자의 세금납부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빈민의 주머니를 착취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제 복지의 축소가 기정사실화면서 오랫동안 매우 강력한 수준으로 보장돼 온 사회복지에 익숙해진 스웨덴 인들 사이에 낯선 불안이 번지고 있다. 다가올 삶에 대한 걱정은 새로운 우파정권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떨어뜨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고용시장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이주인들이나 장애인, 장기 실업자들과 노인들은 곧 불어 닥칠 체감 복지의 축소로 인한 삶의 질 하락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
인근 노르웨이 부자들의 환호 “세금 적은 스웨덴으로 가겠다”
하지만 지금의 스웨덴 사회에서는 이번 법안을 반기는 분위기가 우세한 편이다. 막대한 복지기금을 마련한다는 원칙으로 부자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걷는 제도의 부작용이 지난 몇 십 년 동안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돼 왔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존엄성을 갖고 살 수 있게 지원했던 실업기금은 이른바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 보통 15~34세 사이의 취업인구 가운데 미혼으로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가사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을 양산하기도 했고, 어차피 많은 이윤을 확보해봤자 세금으로 빼앗길 뿐이라 여긴 일부 스웨덴 인들은 탈세를 시도하거나 아예 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계층 양극화를 되도록 완화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형태의 평등을 이루며 중산층 수준의 삶의 질을 골고루 누리려던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성과는 이제 정면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이런 위협은 스웨덴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왔다. 전 세계로 확장된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스웨덴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법안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스웨덴 기업들,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부유세 징수 국가인 노르웨이의 부자들은 이 법을 반기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노르웨이의 부유한 무역업자의 딸로서 상당한 재력가인 카롤리네 하겐은 최근 보도를 접한 뒤 곧 스웨덴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노르웨이 역시 양극화 완화를 위해 오랫동안 스웨덴과 유사한 수준의 직접세를 징수해 온 나라다. 그런데 카롤리네처럼 돈 많은 노르웨이 인들이 언어와 민족, 정서, 문화 등이 상당히 닮은 스웨덴으로 대거 이주하는 것은 노르웨이 의회에게도 큰 불안 요소일 수밖에 없다.
‘스웨덴의 변화’가 ‘호재’라는 이들…결과가 나와도 과연?
곧 닥칠 ‘부유세 폐지 법안 통과’라는 사건을 복지국가를 가능케 했던 사회적 연대의 이념이 퇴색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신호는 스웨덴 체제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봤던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일찍이 1960년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웨덴 병’(Swedish sin)이라는 신조어를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지나친 복지 수혜가 스웨덴에서 높은 자살율과 낮은 노동 의욕, 성적 방종, 반미사상 등을 낳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한국처럼 국민소득 대비 사회복지가 매우 취약한 국가에서는 스웨덴의 유턴 움직임이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느 나라 못지않게 부자와, 해외투기자본, 그리고 외국 기업에게 관대한 한국에서, 이번에 스웨덴 의회에 상정된 법안의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특히 최근 도입된 종합부동산세 등에 대해 일부 집단은 ‘세금폭탄’이라는 표현까지 들고 나온 마당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의 변화는 그들에게 ‘호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호재’일 수 있을까. 그것은 아직 불분명하다. 부유세를 폐지하여 기업과 부자를 붙잡겠다는 스웨덴 의회의 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섣불리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웨덴의 전통적인 복지 체제는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그래서 그것을 뒤흔드는 시도는 어지간한 성과를 내지 않고서는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최근 스웨덴의 변화를 마냥 ‘호재’로만 받아들이는 이들이 곧 닥칠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지 궁금하다.
왜 젊은 미국 유학생은 사민주의자가 됐나?
흔히 스웨덴의 복지제도가 성공한 이유에 대해 당시 중립국이었던 까닭에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점, 자원이 풍부하다는 점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옳은 설명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현실정치에 평화주의의 이상을 심어놓고 제3세계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던 스웨덴의 수상 울루프 팔머(Olof Palme)는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청소년 시절 사민당에 입당했다. 젊은 시절, 그는 미국에 유학했다.
당시 그가 본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 미국의 끔찍한 빈부격차였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그것은 미국식 사회구조에 대한 통찰로, 그리고 복지정책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이어졌다. 흔히 미국 유학 체험이 ‘친미 관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과 다른 사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애 쓴 것은 울루프 팔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스웨덴 인들이 함께 꾼 꿈이었고, 스웨덴의 고유한 복지제도는 그들 모두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지난 1995년 유럽연합 가입은 스웨덴 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했다. 전통적으로 유지해 온 중립국으로서의 정체성에 교란이 생긴 것이다. 이와 함께 좀처럼 줄지 않는 스웨덴의 실업률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게 했다. 이번에 상정된 부유세 폐지 법안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 법안의 성공 여부는 불분명하다. '부유세 폐지 법안'이 어떤 난항을 겪을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스웨덴 병’이라 비웃던 이들이 못 푼 양극화의 과제…제2의 울루프 팔머, 기다린다
다만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복지실험이 실패하기를 끊임없이 바라는 스웨덴 밖의 기대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이유는 스웨덴에서 복지가 갖는 의미를 헤아리지 못 한 채, ‘스웨덴 병’이라는 편견에 스스로를 가둔 아이젠하워 식의 태도가 풀지 못 한 숙제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젊은 미국 유학생 울루프 팔머를 충격에 빠뜨린 미국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이다. 미국, 그리고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국가들이 이런 숙제를 풀지 못하는 한 제2, 제3의 울루프 팔머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박정준/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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